Temper your Fxxx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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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 your Fxxx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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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AU, 아종성배전쟁 이후, 발렌타인데이ENG : https://archiveofourown.org/works/63845380/chapters/16372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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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엘키두가 아침에 일어나서 차를 한 잔 마시러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복도를 꽉 채운 백화점 쇼핑백들과 상자들의 틈새를 유연한 고양이처럼 빠져나와야만 했다. 발끝을 가볍게 세워 조심스럽게 걸어 나와야만 층층이 쌓인 상자들이 무너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최고급 수제 에스프레소 머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갓 이사 왔을 때엔 넓고 반듯했던 아일랜드풍 테이블 위에서 지금의 커피머신은 이탈리아산 크리스털 와인잔 세트가 든 박스와 실제로 사용해본 적 없는 수공예 포슬린 그릇 틈에 파묻혀 있었다. 사용법을 읽기는 커녕 상자도 아직 안 뜯은 착즙기와 여름이나 되어야 쓸지 모르는 제빙기를 슬그머니 치우자 엘키두는 그 사이에서 겨우 물 한 잔 마실 수 있는 머그컵을 발견해냈다.

라는 문구가 인쇄되어있는 컵인데, 테이트가 연구소 개업 기념품으로 주문했다며 나눠줬던 것이다.

친구는 아니었던 이에게서 받은 컵으로 목을 축이면서 주방을 나오자 펜트하우스 천장부를 통해 들어오는 햇볕은 거실에 가득 찬 황금의 가구들이 더욱 요란스러워 보이도록 광을 내고 있었다. 영령이란 보통 생전에 살던 대로 사는 법이지. 그는 성탑의 왕이었으니 다시금 육체를 얻은 지금도, 그리할 것이리라. 퍽 자연스러운 모양새였다. 길가메시에게는.

쌀쌀한 아침에 가볍게 따뜻한 목욕을 하는 것은 어느 새 엘키두가 좋아하는 루틴이 되었지만 온갖 사치스러운 향수병과 목욕용품들 사이에서 뭐가 욕조에 넣었을 때 거품이 나는 병이고 아닌지 보물찾기를 하는 것은 엘키두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은 패키지가 대략 펌프같이 생겼고 분홍색이기에 이걸 짜 넣으면 되겠지라며 치약으로 목욕한 적도 있었다.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벗이라는 자식이 네놈 머리카락 전체에서 스피아민트 향이 난다며 비웃어대기 전까지는.

엘키두는 테이블에 머그컵을 내려놓은 뒤 주홍빛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금사 수가 놓인 벨벳에 푹 파묻힌 채로 생각했다. 다음에는 와사비 향의 샴푸로 두 번 세 번 목욕해야지. 녀석이 습관처럼 내 머리카락을 한 손 가득 쥐어 그 향을 들이키자마자 즉시 매워서 데굴데굴거리는 모양새를 볼 테다. 그러면 그 자식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내려다보며 비웃어줘야지...

그 웃음소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거랑 별개로 열이 받는 건 열 받는 거고, 웃음 외에도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것 또한 재미진 일이다. 어떻게 하면 완전범죄를 저지를지 고민하는 엘키두의 얼굴에서는 어느 새 쿡쿡 하는 웃음이 새어져나왔다.

그러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고층의 빌딩 숲이 내려다보였다. 겨울의 깨끗한 하늘 속 저 멀리서는 비행기 한 대가 구름 사이에 줄을 긋고 있었다. 비행기를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흰색 기체는 천천히 움직였고, 결국 통창 프레임을 넘어 엘키두가 지켜볼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갔다. 일어서서 창문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소간은 더 멀리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테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창가에 다가가면 추웠다. 그래서 그저 그 자리에 한 쪽 뺨을 묻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빌딩풍이 들려주는 소리는 갈대들의 그것과는 달랐지만, 새로운 세상의 리듬은 나름대로 귀를 기울일 만 했다. 녹이나 곰팡이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청결함도 마음에 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새를 비집고 돋아나려 애쓰는 새싹들의 숨소리와도 공명할 수 있었다. 무겁게, 아주 무겁게 생명들이 숨 쉬는 소리. 한참 그것을 듣고 있자니 유리창의 안쪽이 비쳐 보이는 부분에 바로 그 금발 머리 자식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어, 아직도 맞은편 빌딩이 공원 조망을 가리고 있군."

 

금발의 남자는 씩 웃으면서 현관에서 곧장 거실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거 참 안된지고.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친우여! 오늘도 도시계획위원회 놈들에게 두둑이 찔러주고 오는 길이니, 머지않아 탁 트인 전망을 맞이하게 될 지어다. 크하하하!"

 

엘키두는 소파에 파묻힌 채 청록빛 눈동자만 살짝 돌려 길가메시가 평소 같은 화려하고 괴랄한 차림새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이 과시적인 손동작을 하면서. 왠지 오늘은 유독 즐거워 보인다.

 

"짐의 친우이니 항상 최고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아, 그나저나 며칠 있으면 무슨 기념일이라더군, 발렌타인데이라던가? 뭐, 아무튼 기념일이라면 성대하게 보내는 것이 정해져 있을 터! 마음 놓고 기대하도록."

"초콜릿을 주는 날 말이지?"

"초콜릿은 물론이고 장신구며 귀중품을 주고받는다더군! 소소한 디테일은 신경 쓰지 말고 즐기도록 하자꾸나, 이번에는..."

"아니, 길. 이젠 충분하고도 넘쳐. 더 이상 뭘 사지 말아줘. 순전히 부피중량의 문제야."

 

엘키두의 단호한 어조에 길가메시는 의아하다는 듯 한 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호오? 그럼 집을 더 사면 문제가 해결되겠군. 아니, 이제야말로 슬슬 짐이 소유했던 지구라트에 견줄만한 대저택을 건축할 때인가."

"으음... 그런 문제가 아니야."

 

엘키두는 마치 두통이 이는 듯이 이마를 슥슥 비볐고, 길가메시는 그런 엘키두의 곁에 요란하게 털썩 앉았다.

 

"그럼 말해 보거라 친우여. 흐음. 아무래도 이 초록 머리가 무슨 불만이 있나 본데."

 

그렇게 말하며 길가메시는 엘키두를 와락 끌어당겨 목덜미 언저리의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고 향을 들이마셨다. 곧이어 이어지는 만족의 긴 한숨.

 

"잘 들어. 길. 꼭 발렌타인데이에 선물을 주고 싶다면 조건이 있어."

 

또 무슨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하겠느냐는 듯이 길가메시는 한 팔에 엘키두를 끼고 권태롭게 소파에 기댔다. 그러면서 녹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실없이 만지작거렸다.

 

"조건이라, 어디, 들어는 주겠다."

"사치스럽지 않을 것. 그리고 요란하지 않을 것."

 

길가메시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손에 쥔 머리카락을 얼굴로 가져가 다시 숨을 들이켰다.

 

"흐으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왕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지껄여라."

"이제 더 필요한 것도 가질 것도 없어, 길. 네 보물창고에 모든 걸 보관할 게 아니라면 이 이상 무언가가 더 늘어난다는 것은 과해."

"네녀석과 공유하겠다며 선물한 것을 짐이 소지한다면 모순 아니겠느냐?"

"아무튼 조건은 조건이야. 그 이상은 안 돼."

 

길가메시는 뒤로 더욱 기대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뜨며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참. 우르크의 왕성이 그립군, 온갖 부유한 것들로 가득 채운다 한들 감히 아무도 내게 무어라 하지 못했건만."

 

-

 

"그게 다라고요? 쉽네. 적당히 제과점에서 파는 초콜릿이면 되지 않아요?"

 

산라와 테이트의 연구실은 아직도 창고처럼 어수선했고, 테이트의 빈 자리를 제외하면 인간다운 존재의 흔적은 없었다. 산라는 여러 겹으로 쌓인 서류더미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가 길가메시의 사정을 듣고 곧 한숨을 내쉬었다. 난잡한 길목에서 발에 여러 번 채인 난방기 위에는

라는 문구가 프린팅된 머그컵이 올려져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만. 명색이 영웅왕의 하나뿐인 친우다. 어찌 그런 사사로운 것을 건네주고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결국은 본인의 만족에 대한 얘기로군..."

"허, 그렇다면 문제라도?"

 

젊은 마도공학 연구원은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곤란해했다.

아무때나 불쑥불쑥 찾아와서 본인 용무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는 후원인은 누구나 달갑지 않겠지만 그 후원의 규모 때문에라도 참아 넘겨야겠다며 매번 자신을 타이르는 처지이다.

 

"즉, 사치를 부리지 않는 법을 모르는 거군요."

"왕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당연히 수반되는 일이지 않느냐."

"그리고, 발렌타인데이에 뭘 선물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문제고요."

"초콜렛이라고 말할 셈인가? 물론 알고 있다. 다만 최고급품밖에 알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자,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거리로 나간다. 둘째. 초콜릿을 파는 아주 적당한 가게에 간다. 셋째. 초콜릿을 산다! 넷째, 엘키두에게 준다. 끝! 간단하죠? 이제 당장 시작해요. 전 바쁘다고요. 이번에도 개제가 거부되면 정말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니까."

 

쏘아붙이듯이 제 할 말을 하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산라를 보고 길가메시는 다소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태연한 어조로 덧붙였다.

 

"네녀석은 테이트 실버에게 무엇을 줄 생각이지?"

 

산라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그녀는 순식간에 얼은 듯 굳어진 표정으로 길가메시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무슨 말을?"

"잡종들끼리는 무어 하찮은 것을 주고받는 것이 문화인지 묻고 있지 않느냐."

"'왜','어째서' 제가 테이트에게 뭔가를 줄 거라고 생각하죠?!?!?!"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 산라의 격양된 반응과 귀 끝까지 달아오른 홍조를 보자 길가메시는 마침내 상황이 뜻대로 돌아간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우정의 초콜릿이라는 것도 있다고 들었다만... 아무래도 나의 전 마스터는 좀 다른 것을 떠올렸나 보군?"

"우정도 뭣도 없으니까 제발 징그러운 말 좀 그만!"

"호오, 그럼 이런 것도 필요 없겠군."

 

길가메시가 산라에게 뭔가 툭 던지자 산라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았다. 금박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초콜릿 상자. 누가 봐도 엘키두의 기준에는 초과인 물건.

 

"어... 이게?"

"뭐, 의리 초콜릿이라는 거다. 잡종이 누굴 주겠다고 혼자 애를 써봤자 시답잖은 불량식품이나 고르겠지. 하지만 왕을 보필하는 데에 있어서 이 정도 보너스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산라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를 내려다보는 동안 길가메시는 흥미진진한 것을 보는 눈빛을 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줄 사람, 정말 없다니까요. 테이트는 무슨..."

"그럼 본인이 먹던가 하면 되지 않느냐? 누구 입으로 들어가든 음식은 음식. 자아, 그래서..."

 

길가메시는 서류 더미와 박스 사이를 유유히 지나 산라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워 산라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선금도 받았으니 왕을 보필할 차례 아니겠느냐? 그 쥐콩 같은 머리통 안에 든 것을 굴려서 말이지."

"...거절의 여지도 없구만..."

"요란 않으면서 영웅왕과 그 친우의 격에 맞는 선물을 어서 찾아내라."

"...항상 억지를. 그렇다면... 정말 아무 발상이나 괜찮은 건가요."

"듣고 나서 판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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