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가
히루젠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속기록과 신원진술서를 든 두 닌자에게는 정식 문서화 작업에 들 것을 지시 내려 보낸 뒤였다.
아직 알아내야 할 건 많았다. 오늘은 단지 초석에 불과했다.
히루젠은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여름 햇살 아래 뜨겁게 무르익어 가는 너른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히루젠의 생각이 깊어졌다.
두 달여 만에 수확을 봤으니 앞으로는 더 바빠질 것이다. 이 정보에 맞추어 차후 그들의 취급에 관한 계획도 구체화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고비를 넘기고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니, 이번 일엔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행길이 바로 뻔했으나 히루젠은 뿌듯했다.
곧이어 그의 시선은 하늘 한구석 어딘가로 옮겨 갔다. 처음엔 작은 점이 계속 움직여 가까워지면서 형태를 드러냈다. 근래 들어 유독 익숙해진, 전서구였다. 히루젠이 창을 열어젖혔다.
한 마리 새는 쉼 없이 날아 창틀 위로 앉았다. 히루젠은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작은 두루마리를 풀어냈다.
비 마을로 임무를 떠난 5소대의 상황 보고였다. 성공적인 결과에, 12시간 이내 복귀 예정이라는 내용까지 읽으며 히루젠은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끝에 다다르자 미소는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손실로 하급 닌자 1인이 순직했으며, 이름은⋯
호카게의 머릿속에 어린 제자의 밝은 목소리가 스쳤다.
센쥬-
“나와키⋯?”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젊은 닌자는 막 뛰어온 듯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온몸이 완전히 젖어 축축했다. 멀리 하얀 천 아래 덮인 무언가가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츠나데의 발이 힘없이 움직이려 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잡아 오며 말렸다.
“넌 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지라이야,”
무언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츠나데는 멍하니 그 깨끗한 흰색만을 계속 응시했다. 검은 옷 사이에 팔을 걸친 닌자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괜히 힘이나 빼지 말라는 듯 말했다.
“⋯내버려 두라구. 봐 봤자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말야.”
“그만해, 오로치마루!”
지라이야가 크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오로치마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 닌자 신세가 다 그렇지 뭐. 전장엔 의사 따위 있지도 않으니까.”
오로치마루는 옷 속을 뒤적였다. 짧은 시간 뒤 모습을 드러낸 그의 손엔 보석 몇 개와 그를 얽은 줄이 둘둘 감겨 있었다.
츠나데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나저나 어린애들은 너무 설쳐대서 문제야. 특히 선물을 받은 다음 날엔 더하지.”
“오로치마루, 너 그거⋯.”
“가져가, 츠나데. 원래 너희 거잖냐.”
츠나데는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주 간절하게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센쥬 츠나데는 그리 어리석은 인물이 되지 못했다. 어디를 보아도 그 목걸이였다. 그저께, 동생 나와키의 생일 선물로 츠나데가 전한 바로 그 목걸이가 맞았다.
츠나데는 목걸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청년의 목에서 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끝내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호카게는 내 꿈이니까.
아, 그것이 열둘의 유언이 될 줄을 누가 알았던가.
울부짖음도 더는 삼키지 못했다. 오장을 쥐어뜯는 소리가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그러나 쉼 없이 천둥이 쳐대어 그마저도 가려버렸다. 아우를 잃은 누이의 비통함을 누구 하나 들을 길이 없었다.
지라이야는 몸을 숙여 츠나데를 달래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로치마루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츠나데는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고도 끝끝내 동생에게로 향해, 긴 시간 뜬눈으로 곁을 지켰다. 갑작스러운 비가 한밤중이 되어 잦아들고 나서야, 츠나데는 뒤따르는 지라이야를 물리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날, 사람의 온기가 드문 고즈넉한 가택도 하루 내내 흠뻑 젖어 버렸다.
우즈마키 미토는 오랜만에 직접 지팡이를 짚고 뒷마당까지 나섰다. 몇 분을 기다렸을 찰나, 한 남자가 눈치를 살피며 급하게 내려왔다. 괜찮다 해도 그리 걱정스러운지, 남자는 검은색 옷과 천으로 온몸을 둘러 싸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 미토가 살짝 웃자, 남자가 숨죽여 발끈했다.
“전 지금 진지하단 말입니다!”
“내 봉인술이 이중 삼중으로 붙고도 그리 불안해하는 이는 잘 못 봐서 말이야. 하기야 자네는 지금으로 세 번뿐이지? 이쯤이면 얼마 안 지나 적응하던데 안타까울 따름일세. 이제 고작 하루가 남았으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뭘 엄청 잘못한 것 같지 않습니까⋯.”
“안심하란 말이었네. 내가 가면 앞으론 이런 귀찮은 일도 구태여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마시고! 어휴, 그냥 이것부터 받으십시오.”
남자가 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넘겨주었다. 미토는 손끝으로 내용물을 가늠하고 미소지었다.
“고맙네.”
“정말, 이 봉인들이 있으면 아무도 제 차크라를 감지 못하는 것 맞지요?”
“지금껏 일이 없는 걸 보면 모르나. 속고만 산 겐가?”
“아니, 이유가 있단 말입니다. 저도 아직 젊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휴, 요즘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아십니까? 싸우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그 공기에 누구 하나 베여서 나가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또 그렇게 닦달을 하시고⋯, 정말이지.”
“자네 조부와 부친이 내게 신세를 많이 지긴 했지. 은원에 너무 얽매이는 게 마냥 좋지는 않지만, 적당히 충실해서 사는 것도 닌자로서 나쁘진 않은 삶이야.”
“전 가늘고 길게 살 겁니다.”
“그래그래, 그것도 좋지.”
미토는 청년의 응석에 맞장구쳐 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달을 한번 확인하고는 말했다.
“대화는 이만하면 길었군. 가기 전에⋯, 잠깐.”
미토는 술을 해제하려던 남자를 잠시 잡았다. 의아해하는 남자에게 대고,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자네 집안에 정말 고마운 일이 많았네. 조부께는 길 가서 만나 술 한 잔 따를 테니, 부친께 이 말을 전해주면 고맙겠네. 자네도 짧지만 참으로 대견했고, 잘 살게나.”
남자는 잠시 굳어 있더니 곧 허리를 숙이며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미토 님.”
이어 작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 아니 환영분신은 사라졌다. 미토는 지팡이를 움직여 마루 위로 가 앉았다.
봉투를 뜯자 안에서 두 번 접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주름진 손이 종이를 펼쳐 들고 그 위를 한 쌍의 눈이 샅샅이 훑었다. 곧 안심하는 작은 환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미토는 옆에 미리 두었던 화로 안으로 종이를 던져 넣었다. 종이는 그대로 사그라들어 곧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는 다시 지팡이를 들어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기려 했다.
그때 대문을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평온을 깼다. 미토는 깜짝 놀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급히 움직였다. 조금 지나 대문 앞에 서자 익숙한 차크라가 느껴졌다.
잠금쇠를 풀고 특유의 오래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익숙한 인물이 미토를 맞이했다.
“츠나?”
“⋯할머니.”
“이 시간엔 웬일이냐? 그보다도, 대체 뭐길래 이리⋯.”
미토는 손녀를 부여잡았다. 푹 숙인 얼굴을 간신히 올려 보고 나니 온통 부었고, 눈가는 완전히 짓물러 있었다. 미토가 놀랄 틈도 없이 츠나데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내려 버렸다.
처진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황망한 미토를 앞에 두고 츠나데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키가 떠났어요.”
미토는 그대로 굳었다.
“⋯그게 정말이냐?”
츠나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울음만이 대답을 대신했다. 미토는⋯, 아까 편지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다시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의 손자다. 그들은 그의 고향에 관한 일을 그리 숨기더니, 이제는 혈육의 생사마저 상처 입은 손녀의 입으로 듣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뒷방 노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럴 수가 있냐는 말이다. 주먹 쥔 미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츠나,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죄송해요⋯.”
“그러지 마라. 대체 네가 무어 잘못한 게 있어 그러느냔 말이야!”
“그 얘기가 아니에요!”
츠나데가 소리쳤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때,”
“그때,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암부 대원들이 마을 쪽으로 날아오는 새를 잡아 죽이는 걸⋯, 제가 봤어요. 어떤 건 조금 늦는 바람에, 제 앞으로 떨어지기도 했고요. 그 새를 가져가며 입을 닫으랬고⋯, 전 그렇게 했죠. 마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뭔지는 모르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소용돌이 마을 일인 건 저도 다음 날, 그때 알았어요.”
미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녀를 바라보았다. 츠나데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 그때라도 말하지 않았어요. 소용돌이와 함께 가는 건 나뭇잎에 이롭지 못하다고,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가 그날 그 닌자에게 저항했다면 뭔가 달랐을까요? 새를 내주지 않고 도망가서 그 편지를 봤다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다음날이라도 조금 다른 사람들 사이에 진실을 알렸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요?”
“무언가 조금만 달랐다면, 혹시라도 제가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와키도⋯.”
츠나데의 말이 잦아들었다.
“이번 일만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죄책감 하나 없이 편히 웃고 떠들며 지내는 중이겠죠. 저를 더는 보지 않겠다 하셔도 이해해요.”
그는 젖은 얼굴을 쓸어넘겼다.
“결국 지금도 제가 잃은 게 한스러워서 쏟아내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 뒤로는 미토가 잡을 새도 없었다. 츠나데는 그대로 뛰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공을 바라보던 미토는 이를 앙다물고, 삐걱대는 몸을 옮겨 문을 닫았다.
갑작스레 떨어진 사실은 지나치게 파괴적이었다. 집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평소답지 않게 숨이 차올랐다. 미토는 지팡이에 기대다시피 하며 간신히 한 방 앞에 도달했다.
그 문을 열고 나면, 바닥에 깐 이불 위로 귀중한 붉은 머릿결이 보였다. 어린 쿠시나는 방금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세상 평화롭게 잠든 채였다. 미토는 떨리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그 앞에 가 앉았다.
처음 그대로 바르게 있는 이불을 쓰다듬으며, 미토는 웃었다. 그는 편지의 내용을 다시금 생각했다.
‘츠나, 어째서 나를 보지 못하니. 결국 영원히 묻힐 수도 묻어둘 수도 없는 것을⋯. 깨닫는 이들이 영원히 너처럼 한둘뿐인 것도 아닐진대, 그때 가서야 고개를 들려 하느냐. 홀로 견디기가 어려운 게야.’
‘그렇다면 갚자. 전부 갚자꾸나. 그러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네 모습을 다시 보고 싶구나.’
부대는 소용돌이 터에서 총 두 사람을 발견했으며, 즉각 이송되어 치료를⋯
약관이 되지 않은 닌자 남녀로⋯
회복은 순조로운 상태⋯
혈족계승을 갖추지 않은 일반 성씨이나, 소용돌이 주민인 것은 진술을⋯
“쿠시나,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은원을 좇되 은원에 휘둘리지 않도록⋯, 그 어려운 삶을, 그들과 함께 의지하여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구나.”
미토는 이불 위로 작은 몸을 토닥였다. 세월이 스친 노인의 얼굴에서 마침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극락왕생하소서⋯.”
그는 어리석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잃으면서 떠난다. 하지만 그의 아이는 그렇지 않길 바랐다.
‘쿠시나, 부디 이 늙은이처럼 지울 것을 지우고 버릴 것을 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지 말거라.’
미토는 생각했다.
결국, 소용돌이는 기억하겠지.
뜬눈 속에 새벽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밤에 닿았다.
곧은 눈, 다부진 입매.
아직 소년의 모습이 남은 얼굴은 담담하지만 따뜻했어. 숱한 원로 닌자들 속이었지만, 장대한 젊은이는 흥미로우리만큼 당당했지.
센쥬 일족을 이끄는 하시라마라 합니다.
그 속에서 보았던 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그 시절이란 그야말로 수라장에 생지옥이라, 강은 붉고 땅은 검은 것이 오히려 평범한 형편이었지. 어제 인사한 아이는 오늘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오늘 스쳐 간 노인은 내일 직접 눈을 감겼어.
왜 모두들 패(覇)를 쥐려 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두고 안심할 수 없어, 쫓아가 끝내 짓밟아 놓아야만 하는 이 고리를 누가 이어 냈는가.
죽는 날까지 영원히 이곳에 묶여 굴러갈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어.
이 한 운명을 끝까지 그런 속에서 보낼 수는 없었어.
하지만 뜻을 가진다면 그 뒤는 무엇이지? 장손, 인정받은 닌자⋯, 언뜻 든든해 보이는 것도 그런 앞에서는 한낱 부속일 뿐이지.
끝없는 전쟁이란 거대한 흐름 속에 우린 이미 한참 전부터 말려들었어. 저런 죽 늘어선 수식은, 그 안에서 벗어난다는 단꿈을 꾸기에는 너무 가벼웠어.
함께할 이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이미 꿈이었고,
순간은 바로 그때 찾아온 거야.
싸움을 멈출 겁니다.
비록 지금은 일어나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이어가지만, 저는 여기서 이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이 생애 힘이 닿는 한 반드시 다툼 없는 평온한 날을 보고야 말겠습니다.
-공께서는 그런 날이 온다 확신하시는 눈치군요. 외람되지만 제게 지금은 안개 덮인 첩첩산중과 같아서, 보고픈 마음에도 볼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답니다. 공의 자신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거 부끄럽군요. 하지만 소저가 말씀하신 바는 저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 역시 눈앞이 캄캄하여 가슴 한편이 콱 막혀올 때가 분명 있습니다.
-공 역시 그러하시다고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날마다 그에 사로잡혀 차마 생각도 못 하는 적이 적지 않거늘, 공께서는 불안을 떨쳐내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야 결국은 그리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 아우야 늘 참 못마땅해하고, 가끔은 무모하다 평하기도 하지만⋯, 제게는 오직 그날을 향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하시라마에게는 그 믿음이 바로 확신입니다.
-그 확신에도 다시 확신이 있으신 겝니까?
충분합니다.
무릇 혼란한 시대에는 영웅이 일기 마련이야. 그들은 온갖 힘과 숱한 말을 들고 순식간에 나타나서 또 순식간에 사라지지.
하지만 어떤 영웅은, 비록 무모하다고 공상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사람이 아닌 시대를 겨눌 수 있었어.
나는 그때 깨달았어.
저는 그때까지 함께 힘을 나눌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마침내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고.
가슴 속에만 품었던 뜻을 내 앞에 펼쳐 보일 사람을.
우린 깊이 사랑했고, 서로 같이 받든 그 뜻을 사랑했어. 마을이라는, 그 커다란 유산을 보고 있노라면 논할 수 없는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랐어. 그러고 나서 다시 확고한 얼굴을 마주하면, 정말 무엇이라도 전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날도 마찬가지였지. 이제는 서른에 가까운 이가 오랜 벗의 숨을 끊고, 들은 적뿐인 귀신과 함께 돌아오던 날. 저 멀리 분노로 가득 찬 두 눈과 목전에 든 피로한 낯을 번갈아 본 뒤, 나는 바로 입을 떼었어.
옛 기록에 이르기를 ‘인주력’이라는 방법이 있죠.
내가 하겠어요.
그 뒤로도 한동안은 퍽 평화로웠어. 혼란한 세상에도 조금씩 질서라는 것이 잡혀가기 시작했지. 나는 세 아이를 낳아 주었고, 그동안에도 늘 옆에 있었어. 하루하루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곤 했어.
하지만 아무리 신이라 불린 이라도 세상 흐름을 전부 발아래 둘 수는 없는 법이야.
⋯글쎄 거기서 인주력이 폭주했대. 사람이 아니라 일가로만 세어도 수십이 죽었다지 뭔가.
아니, 뭘 어떻게 하면 나름 고르고 골랐을 사람이 고작 그거 하나 통제를 못 해서 이 사달을 내? 그나저나 그 귀신들이 그 정도나 되는 괴물이라니, 끔찍하구먼.
그런데 그 미수란 것들 말이야, 처음엔 전부 한 사람이 잡아들인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나뭇잎 마을⋯, 아마 호카게라고 했나? 뭐, 그렇지?
이거 생각해 보면 좀 소름 돋는 일 아냐? 미수 하나로도 그렇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것들이랑 혼자 싸워서 전부 이길 정도면 그 사람은 대체 어떻단 소리야?
뭐 너무 나간 거일 수도 있겠지만, 또 누가 알아? 그런 사람이 혹여 이상한 마음이라도 먹으면 그걸 또 어떻게 말리냔 말이야⋯
소문은 바람을 타고 눈덩이처럼 불어났어. 위기감이 일었고, 결국 무언가 해야만 했지.
센쥬를 흩읍시다.
오늘을 위해 내일의 수족을 전부 잘라내는 행위라, 어찌 보아도 현명하다 논할 수는 없었어.
그러나, 다른 길이 보인다면 좋았겠지만⋯, 내게는 아직도 그 사방이 여전히 안개 속이었어.
그러니까, 결국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내가 고른 내 영웅의 선택을.
아직 어린 둘째와 막내를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냈어. 잔뜩 저자세를 취하고, 수많은 센쥬가 속속들이 신부와 데릴사위가 되어 떠났어. 어떤 이는 홀몸으로 아예 성을 버리기도 했어.
제씨(弟氏)는 끝까지 피를 토할 정도로 반대했고, 한동안 형을 보지 않으려는 듯했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어. 그만큼 급한 상황이었던 게지.
그런데 불길이 너무 컸던 모양이야.
이게 정녕 당신의 의지인가요.
그때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난 기필코 싸움을 멈출 겁니다.
난 영원히 함께함을 맹세한 그 손으로 직접 칼을 내주었어. 그리고 센쥬 하시라마 타계의 증인이 되었지. 마찬가지로 그의 뜻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다시 싸움이 일어나고, 제씨마저 끝내 형을 뒤따르는 모습을 보자니⋯. 어지러웠어.
그렇게 나뭇잎이 한번 뒤바뀌었지. 젊은이들이 새롭게 떠올랐어.
그들에게 난 사모(師母)였지만, 그것이 특별히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어. 내 사람이라 부를 만한 이는 한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까. 남은 맏아이는, 아버지 일과 뒤이은 전쟁으로 은연중 어미를 미워했지.
그 아이가 자식들을 두고 뜻밖에 이른 때 수의를 입을 무렵, 내 마음은 어느샌가 다른 곳에 가 있었어. 내 고향, 내 동족.
하지만 나뭇잎의 젊은이들은 나 역시 ‘나뭇잎 사람’이길 바랬지. 결국 그날⋯. 나는 이제 그들을 기릴 자격조차 갖지 못해.
영웅은 스러졌어. 그러나 혼란은 아직 가시지 않았던 게야.
그렇다면 이제는 또 어떤 영웅이 필요하지?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영웅이란⋯
“미토 님?”
쿠시나가 노부인의 이름을 불렀다. 미토는 아이의 겉옷을 정리하던 손을 다시 움직여 매무새를 마저 다듬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어깨 쪽을 한 번씩 쓸어낸 뒤, 미토는 쿠시나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셨어요?”
“별거 아니란다. 그냥 흔한 옛날 이야기야.”
미토는 긴 소매를 끌러 양손으로 쿠시나의 작은 손을 감쌌다. 그가 말했다.
“쿠시나, 내가 아까 말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지?”
“네.”
“잘했구나. 절대로 잊지 말거라.”
“그럴 거예요. 하지만⋯,”
쿠시나가 팔을 뻗어 미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미토 역시 주름진 손으로 곱게 빗은 붉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쿠시나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쿠시나는 그 이상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 짧은 한마디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응집되어 있는지 미토는 잘 알았다. 그는 늙은 몸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아이를 품 안으로 들였다.
“넌 소용돌이 마을의 우즈마키 일족 사람이야. 비록 공간은 사라졌어도,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한 뿌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그곳을 이룬 모든 것이 네 안에 있고, 마찬가지로 나도 늘 네 곁에 있을 거란다. 옆에 선 사람을 믿고, 의지를 가진 너 자신을 믿으렴.”
비록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미토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인제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떤 영웅은 분명 세상을 바꿀 수 있었지만, 그 어떤 영웅도 시대를 주무를 수는 없는 법이다. 영웅이 일구고 꿈꾼 것을 후세에까지 이어 나가는 것은 그 사람들의 몫이었다.
영웅에게 믿음을 맡기어 의지하는 길도 필요하나, 그 믿음을 단지 옆에서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전부라 여겨서는 안 됐다.
가장 먼저 스스로 생각해야 했다. 각기 다른 본인의 의지를 그저 묻고 가지 말아야 했다. 그들 모두 영웅을 따르기에 앞서 그들 자신만의 영웅으로도 남아 있어야 했다.
‘너무 늦었지만 오늘에라도 알아 다행일까, 아가. 적어도 네게는 전해줄 수가 있으니.’
미토는 생각했다.
“미토 님,”
그때 둘 중 누구도 아닌 목소리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고개를 든 미토와 쿠시나의 시선이 방문을 향했다.
“움직이실 시간입니다.”
목소리가 말했다.
“바로 나가지.”
미토는 목에 힘을 주어 답했다. 노부인은 그새 살짝 굳은 쿠시나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며 미소지었다. 그는 옆에 두었던 지팡이를 세워 짚었다.
뒤이어 쿠시나가 미토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함께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자 단정히 차림을 한 여자와 남자가 가볍게 숙여 예를 표했다. 그들은 작은 손짓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미토와 쿠시나는 그들을 따라 움직여 대문 밖, 미리 준비된 수레에 올랐다.
바퀴가 차츰차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토는 지나온 대문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마을의 문양, 소용돌이를 품은 나뭇잎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금이 가고 갈라져 있었다.
그 수십 년 세월을 묵묵히 버틴 수문장이 멀어졌다. 삶으로 그득해 넘칠 때부터, 침묵이 깔리기까지 그 기억을 모두 간직한 너른 고택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