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 육도에서 동쪽으로

Nar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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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육도에서 동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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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스무 살 우치하 사라다는 우즈마키 나루토의 시신을 데리고 50여 년 전으로 향했다. 고의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50이란 숫자만은 말이다.어찌 되었는지, 갑작스레 몸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또 불타 버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도 –나름대로- 그가 뜻한 바는 없었다.⋯누가 믿겠냐마는.
Note
반야 般若 - 대승 불교에서,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 온갖 분별과 망상에서 벗어나 존재의 참모습을 앎으로써 성불에 이르게 되는 마음의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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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사람은

쿠시나는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새 미토의 손을 하얗게 질릴 정도로 붙들고 있었다. 미토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작은 손을 살짝 주무르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쿠시나가 노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우리 동향 사람 둘이 살아서 여기 왔단다.

두 사람은 바로 오늘, 미토가 이 사실을 쿠시나에게 알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기쁜 소식이었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당장에도 뛰쳐나갈 듯한 쿠시나를 미토가 말렸다.

이건 아직 알려져선 안 될 이야기야. 아마 위에서 더 길게 지켜보기로 판단한 것 같구나. 나마저도 이리 뒤늦게 전해 들은 소식이니, 너는 더더욱이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서 어느 정도 판단이 선다 싶으면, 분명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이용하게 될 거야. 너에게도 분명 연락이 가겠지.
그럼 그때는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도 될까요?

쿠시나는 해맑게 물었다. 그러나 미토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들을 받아들이긴 해도 완전한 신뢰는 이루기 어렵단다. 굳이 ‘인주력’과의 불안한 접촉을 허락하려 들지 않을 게야.
하지만 쿠시나, 넌 꼭 그들을 만나야 해. 나는 부끄럽게도 늘 네게 조용히 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들과 연을 이어야 해. 네 편을 일궈야 한다.

그러나 미토는 정작 소용돌이 멸망의 진실에 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아이의 상실감이 어느 정도인지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벌써 분노로 번진다면, 감싸줄 어른 하나 없이 고립된 어린아이가 생존을 장담할 수나 있을는지. 그는 두려웠다.

어찌 보면 하찮은 변명이다. 훗날 쿠시나가 그리 비난하더라도 미토는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 이해를 바랄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이 모든 것을 두고 은연중에 사죄를 전했다.

미안하구나. 제대로 된 길 하나 내주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내 책임이야⋯. 정말 미안하다.

“여기입니다, 미토 님.”

두 사람은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우거진 풀숲과 바윗덩어리 사이로 의자 두 개가 놓였고, 그 주위에 여러 사람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개중 몇은 무장한 닌자, 또 몇은 결계와 봉인술을 익힌 이들이었고, 그 중심엔⋯, 호카게가 있었다.

미토가 지팡이를 짚어 수레에서 내렸다. 쿠시나가 옆에서 그를 부축했다. 미토는 절뚝이며 히루젠의 앞에 서 말했다.

“밤중에 먼 걸음을 했구려. 이리 많은 이들 시간을 뺏을 생각은 없었는데, 괜히 미안하군.”

히루젠은 말이 없었다. 그는 다만 미토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쭉 침묵을 유지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미토는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몸을 돌려 말했다.

“시작하세.”

쿠시나는 눈치를 보다가 서서히 미토의 손을 놓았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한 발짝씩 먼발치에 놓인 의자를 향해 갔다. 미토도 그 모습을 주시하다 역시 움직였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허리띠를 끌렀다. 긴 겉옷을 풀어 내리자, 배를 드러낸 윗옷 아래로 각각 흔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복잡한 봉인 문양이 대조적으로 드러났다.

닌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 주변으로 몰려와 섰다. 서너 명 정도 되는 이가 두 사람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고정했다. 쿠시나 곁에는 봉인술사들이 몇 더 붙어 준비를 시작했다. 결계사 여럿이 손을 들어 사방을 막으로 덮었다.

미토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노인의 얼굴에 작게 핏줄이 섬과 함께 검은 문양이 꿈틀거렸다. 덩굴 같은 문양이 점차 노인의 온몸으로 번졌다. 전신은 부들부들 떨리며 온통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목에서 바람 새는 외마디 신음이 터져 나오고 나면, 마침내 태고의 귀신이 다시 세상 밖을 맞이했다.

분노에 찬 붉은 차크라가 하늘을 덮었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온 주변이 계속해서 진동했다. 차마 범접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검은 눈동자는 침착했다. 귀신이 온전히 제 모습을 되찾으려는 찰나, 미토는 즉시 사슬을 펼쳤다. 금빛 차크라 덩어리가 몸부림치는 여우를 포박해 붙들었다. 쿠시나 역시 정신을 차리고 합세했다.

사슬 다발이 여우를 조금씩 한쪽으로 밀고 끌어당겼다.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끔찍한 소리가 사방을 울려 귀가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미수는 그 차크라 사슬 앞에서 여전히 무력했다.

쿠시나와 봉인술사들이 인을 맺었다. 차크라가 뭉친 손들이 튀어나와 여우를 더욱 강하게 짓눌러 끌었다. 일은 이미 종국에 접어들었다. 여우는 붉은 눈을 크게 뜨고 눈앞에 선 이들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발톱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여우가 마지막으로 커다랗게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 아우성이 채 사그라들기 전, 일은 전부 끝났다.

완전히 땀투성이가 된 쿠시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금방이라도 픽 쓰러져 멎어버릴 것 같았다. 갑작스레 몸속에 든 거대한 차크라에 적응하지 못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쿠시나는 배를 문질렀다. 늘 상상만 했던 ‘증표’가 이제는 정말로 그에게 있었다.

순간 쿠시나의 정신이 한곳으로 튀었다. 그를 알아챈 순간, 쿠시나는 다른 것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닌자들의 손을 뿌리쳐 뛰었다. 아직 힘이 다 돌아오지 않은 몸으로 쿠시나는 넘어지듯 미토의 앞에 무릎 꿇었다.

미토는 허리를 잔뜩 숙인 채로 끝없이 넘어오는 핏덩이를 힘겹게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었다. 쿠시나의 손이 하얗게 질린 얼굴 앞에서 갈 곳을 잃고 서성였다.

몇 번 기침과 함께 몸이 크게 들썩이고, 미토는 잠시 숨을 골랐다. 미토는 허공에서 떨리는 쿠시나의 손을 한데 잡아 자신의 손으로 덮어 토닥였다.

쿠시나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미토는 마지막 힘으로 다시 등을 펴 쿠시나와 눈을 마주 보았다. 미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가에 후련한 잔주름이 서렸다. 미토가 작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쿠시나 역시 똑같이 했다. 아이의 눈에 고인 물방울이 끝내 흘러내렸다. 웃어 보이던 검은 눈이 조금씩, 조금씩 감기더니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쿠시나는 더 참지 못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고요하던 숲속에 아이의 서러운 통곡만이 가득해졌다. 히루젠은 착잡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쿠시나는 울음 속으로 뻘건 눈을 떴다. 그는 우즈마키의 쿠시나다. 우즈마키 미토는 이제 쿠시나의 일부다. 노인의 모든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안에 살아 있었다. 쿠시나는 하나하나 전부 새겼다.

그는 기억할 것이다.

보름날 달빛이 붉은 머리카락 위에 밝게 내렸다.

얻은 것이 있어 잃은 것도 많았지. 기쁨이 있었으니 늘 슬픔이 따랐어. 하지만 삶이든 마음이든, 무엇 하나 뜻 없이 헛되기만 한 건 아니야.
맞아, 그래⋯.

 

 

이무소득고, 以無所得故,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다, 菩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
고심무가애, 故心無罣礙,
무가애고 무유공포, 無罣礙故 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三世諸佛依般若波羅蜜多,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고지 반야바라밀다, 故知 般若波羅蜜多,
시대신주 시대명주, 是大神呪 是大明呪,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즉설주왈⋯ 卽說呪曰⋯

불 꺼진 장례식장은 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깜깜한 방중에 촛불만을 켜 놓고 츠나데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듯 눈을 감은 이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츠나데는 하루간 정신없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 기억을 살폈다. 그리고 드디어 한참 전부터 몸을 맴돌던 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가셨구나.’

츠나데는 눈을 떠 촛불을 바라보았다. 촛불도 그의 마음을 닮았는지 이상하게 계속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츠나데가 한탄했다.

“무정도 하지. 누나는 동생을 앞세우고, 손녀는 할머니를 저버리고⋯.”

츠나데는 손때 묻은 염주를 천천히 굴렸다. 번뇌가 지친 몸을 떠나려 들지 않았다.

그때 웬 발소리가 들려왔다. 츠나데가 눈을 들어 보니 그는 구식 등 하나를 가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추측하기 어려운 이는 아니었다. 츠나데는 일순 들었던 경계심을 바로 내려놓았다.

곧 장례식장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새벽 순찰을 나선 듯했다. 백발이 성성한 여자는 여지껏 깨어 있는 츠나데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츠나데 공주. 안 자?”
“잠이 오질 않아서요.”
“그래도 상주인데, 몸은 챙겨야지.”
“잡생각이 좀⋯.”

츠나데는 물끄러미 아래를 향해 숙였다. 말은 더 없이 염주알을 세는 손만이 계속 움직였다. 주인이 그 모습을 응시하다 이내 털썩 걸터앉았다. 그는 등을 옆에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제단 위, 꽃에 둘러싸인 사진 하나가 주인의 눈 안에 들었다.

“가여운 것.”

츠나데는 별달리 반응이 없었다. 주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애들이 죽기 딱 좋은 시기야. 죄는 어른들 몫인데, 책임은 뭣도 모르는 어린애들이 지고 죽어 나가는 거지. 원래 장례는 좀 손해 보는 장사여야 하는데, 참⋯.”

그리고 덧붙였다.

“나도 얼마 전에 손주놈 하나를 보냈어. 외손녀를, 아직도 참 젊었는데 말이야.”

츠나데가 고개를 들었다.

“나야 물론 괴로웠지만, 이미 부모도 전에 잃고 둘뿐만 남았던 터라⋯, 오라비가 정말 힘들어했지. 이제 막 결혼해서 애도 얻고, 인생이 좀 꽃피나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내 손자니까 한 대 쳐서라도 일으키고 싶었는데, 그 꼴을 보고 내가 그러지를 못했어. 다행히 얼마 지나고 알아서 잘 털어내긴 했지만⋯, 요즘은 또 골치야. 호카게가 되겠다고 그러거든. 이런 세상에⋯.”

호카게는 내 꿈이니까.

“무슨 생각인지는 들어 보셨어요?”
“아니. 답답하기만 해서 말을 못 꺼냈어. 어차피 이젠 집안에 남은 사람도 별로 없고, 마음만 같아선 안전하게 여기 주인 노릇이나 물려받아 살면 좋으련만.”
“그런 꿈은 함부로 못 말려요. 제 동생도 그랬거든ㅇ, 아⋯, 이상한 뜻은 아니었어요.”
“어유, 아냐. 이거 또 내가 괜한 말을 꺼내서.”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잠시 조용해졌다가, 이번엔 츠나데가 먼저 말했다.

“아침 되면 한 분을 더 모셔야 할지도 몰라요.”
“뭐? 갑자기 누구⋯, 아.”

나와키의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츠나데의 친족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주인이 곧장 눈치챈 사실을 츠나데는 덤덤히 확인시켜 주었다.

“네. 조모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명복을 빌게.”
“감사드려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대로 평범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분께도 따로 들은 말이 없고, 위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그래요.”
“아무튼, 잘 되면 내가 특별히 신경 써 줄게.”
“네.”
“기왕지사, 이리 왔으니 향이나 한번 올리고 가자.”

주인이 몸을 일으켜 방 가운데 들어왔다. 향을 하나 들어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차분히 절차가 진행되었다. 츠나데는 염주를 고이 쥔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동작이 끝나고, 주인이 탄식하듯 말했다.

“하늘도 무심해. 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전쟁은 이미 지나갔고, 이십 년을 아무 일 없었으니 됐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내가 너무 순진했나?”

그에 츠나데가 대답했다.

“어차피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래도 알 수 있었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겠죠. 나와키처럼, 주인 할머니의 외손녀처럼.

츠나데는 말을 삼켰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낮에 질리도록 들었던 경전의 한 구절이 스쳤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도 없어,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드니라.

그들은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있었을지 없었을진 모르나, 정말 그러했기를 바라는 건 과분한 욕심이다. 이제는 살아남은 이들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전장엔 의사 따위 있지도 않으니까.

그 말대로, 전장에는 의사가 없다. 그들은 오로지 마을 안 딱딱한 건물에만 묶여 있다. 그들은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져 죽어가는 이에게 곧장 달려올 수 없다.

츠나데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는 주인과 인사했다.

나흘 뒤, 츠나데는 용기를 내어 묘지로 찾아갔다. 동생을 땅에 묻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비석이 아직도 깨끗하고 반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누이에게선 다시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츠나데는 이제 두 사람의 유품이 된 목걸이를 꽉 쥐었다. 동생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비참한 얼굴로 결심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마을 내 한 장례식장이 유독 시끄러웠다. 물론 다행히도 흔히 생각할 만한 그런 일은 아니었다. 장성한 외손자가 할머니-주인-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물건 정리를 돕고 있었을 뿐이다.

“이눔아, 내가 너 때문에 맨날 속이 탄다, 속이 타! 어찌 오래 집 비우는 일을 그리 망설임도 없이 턱턱 받아와?”
“하하, 그래도 또 맨날 잘 갔다 오잖아요. 보세요. 이번에도 이렇게 멀쩡하다고요.”
“이 봐라.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려고⋯. 됐다. 그래, 그거나 거기 잘 놔라.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누.”
“할머니도 참.”

남자는 나무 화분을 가볍게 들어 놓았다. 그는 뒤돌아 보란 듯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차피 당분간은 웬만해선 호출 없을 거예요. 소용돌이 건도 있고, 이제 8월 중순이니 조금만 있으면 가을장마잖아요. 거기는 안 그래도 비가 더 와서 한참 정비 중이거든요.”
“뭐, 오랜만에 듣기 좋은 소식이 하나 생겼구나.”
“그렇죠? 사실 저도 임무보단 회의가 훨씬 더 좋긴 해요.”

남자가 눈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말했다.

“슬슬 가 볼 시간이네요.”
“그래. 회의는 나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어여 가. 가서 아주 실컷 하고 오너라.”
“금방 올게요, 할머니.”

남자가 출구를 향해 뛰어갔다. 주인은 그 뒷모습을 영 개운치 못한 얼굴로 보다가 크게 소리쳐 인사했다.

“몸조심해라, 단!”

 

 

9월, 한참 우수수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여기 이들의 귀에 그 기척은 다른 것에 가려져 들리지도 않았다. 머리를 감은 붕대가 듣기 좋게 서걱서걱 잘려나갔다. 가위가 다 들고 나자 닌자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흰 붕대를 휘휘 풀어냈다.

누군들 이 순간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담당 닌자는 물론이고, 그간 나루토를 함께 맡은 모든 의료 닌자, 심지어 시종일관 속내를 감추던 사라다까지 얼굴에 잔뜩 긴장과 기대감을 띄웠다.

한 닌자가 옆에서 나루토의 손에 거울을 건넸다. 붕대를 푸는 동안 나루토는 단 한 번도 거울에 눈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마였다. 그 조금 아래, 당연하지만 눈썹은 한 올도 자라 있지 않고 깨끗했다.

다음은 눈이었다. 두 가지 색 눈을 갖게 된 것은 이미 익숙했고, 밋밋하던 눈꺼풀이 거짓 설명에 충실하게 겹으로 되어 있었다. 속눈썹도 역시 없었다.

그 밑으로도 차례차례 드러났다. 코는 끝이 둥글어 살짝 휘었고, 볼에 세 가닥 수염 무늬는 있을 리도 없었다. 입술은 유독 도드라졌다. 그리고 얼굴이 전체로 몹시 야위어 보였다.

마침내 그 위를 답답하게 짓누르던 것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시원한 공기와 함께 해방감이 찾아왔다. 나루토는 눈을 깜빡였다. 뜻했던 대로 변화는 확실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사이 담당이 잔뜩 들떠서 말했다.

“역시 3주면 충분할 줄 알았지. 소감이 어때?”

나루토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대답했다.

[꽤 괜찮네.]
“그렇지? 아무래도 거의 닌자를 보니까, 직업 특성상 얼굴 만들기는 다들 장인이거든. 그중에도 내가 특히 전문이지.”
“선배, 실력 좋으신 건 알겠지만 자랑은 그쯤 하시고요. 자, 카키네 군, 여기 좀 봐 봐.”

옆에서 난데없이 다른 닌자가 튀어나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나루토는 흠칫 놀랐으나 무의식적으로 반듯하게 응했다. 그리고는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호카게 때 버릇이 아직도⋯.’

닌자는 찍은 사진을 확인하더니 가볍게 툭 내뱉었다.

“잘 나왔네.”
[뭐야?] 나루토가 다급하게 물었다. 담당이 횡설수설 답했다.
“어어, 별거 아냐. 닌자 등록증에 쓸 사진이 필요하거든. 그냥 필요한 절차야. 야! 넌 설명이란 말도 모르냐?”

담당이 닌자에게 성을 냈다. 하지만 닌자는 놀란 티도 없이 예사스레 말했다.

“카에리 쨩은 진작에 다 찍어서 보냈거든요. 또 느릿느릿 하다가 경이나 칠까요? 우린 그렇게 여유로운 입장 아녜요. 사진 좀 급하게 찍는다고 등록증이 이상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참⋯. 저도 질리네요.”
“으휴, 그래. 그래서 볼일 끝났으면 좀 가 봐라. 가!”
“안 그래도, 갑니다.”

두 닌자는 마지막까지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욱한 것을 간신히 눌러 참던 사라다는 나가는 닌자의 등에 대고 한껏 쏘아보았다. 병실 문이 닫히자 담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기록부란. 여하튼, 중간중간 나왔던 사람들한테 조금씩 들었지? 퇴원하면 바로 정식 닌자라며.”
[그럴 거라고 하던데.]
“복 받았네. 그거 절대 쉽지 않았을 텐데⋯. 좌우지간 지금은 음성 장애만 빼면 다 완치 상태야. 그런데 수어를 쓰니까 퇴원은 좀 빨라질 것 같네. 나가도 주기적으로 통원 치료는 필요하지만⋯. 그러고 보니 카에리 쨩은 이제 좀 나았다고 하지 않았어?”

순식간에 시선이 한 곳으로 옮겨 갔다. 사라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하루에 몇 마디 하면 더는 못 해요.”

잔뜩 쉬어 아픈 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라다는 이질감에 입을 닫고 목을 매만졌다. 아이가 그러는 걸 보자니 담당은 어딘가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어색하게 말했다.

“뭐, 진전은 진전이니까⋯. 아무튼, 얼굴을 다시 올리긴 했지만 예전만큼 자유자재로 움직이진 않을 거야. 위에 가상의 가면을 씌워서 얼굴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술법도 있는데, 혹시 나중에 필요한 임무라도 떨어지면 한번 알아보고.”
[참고하지.]

그리고 담당이 갑자기 나루토의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발끝부터 시작해서 상체, 갓 드러난 얼굴을 거쳐 머리끝까지 샅샅이 이상한 눈길이 닿았다. 나루토가 아직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도 의문을 드러냈다. 이윽고 담당이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신기한 차크라야. 어떻게 하면 회복을 이렇게까지⋯. 끝나가는 김에 말하는 건데, 혹시 네 차크라 연구 맡겨 볼 생각 없어?”
[별로. 비슷한 사람 본 적 있는데 엮일 때마다 결과가 안 좋았어.]

나루토가 단호하게 답했다. 실험? 오로치마루? 그쪽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나름 개심하고 한 아이 미츠키의 부모로 거듭난 뒤라면 몰라도, 그가 소년 시절 오로치마루는 참으로 징그러운 적이었다. 그 시기 오로치마루도, 그와 관련된 부분도 두 번 다시는 함께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로치마루도 아직은 별일이 없는 건가?’

나루토는 생각했다. 지라이야와 츠나데의 동지로서 그를 직접 볼 가능성이 생기다니, 느낌이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거기서, 고향 마을을 부수고 스승을 죽음으로 이끈 광인으로까지 간 경위가 궁금하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졸라서라도 오로치마루 얘기를 좀 들어 둘걸.’

혹시 오로치마루의 변심을 미리 막아 볼 수 있을까? 그가 저질렀던 악행을 없는 것으로 할 수 있을까?

사스케가 헛되이 흔들릴 여지를 없앨 수 있을까?

‘그런데 미츠키는?’

나루토는 어느새 혼자서 고민에 빠졌다. 오로치마루를 어떻게든 붙들면 이점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미츠키가 태어나지 못할 확률이 높아진다. 반대도 비슷했다.

‘양쪽 다 놓치지 않는 방법은⋯.’

나루토는 살짝 눈을 굴려 창문을 보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내리는 비에 풍경도 허옇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추적추적 유리에 묻어났다.

 

 

아이는 이곳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달 전, 자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부모의 손에 이끌려 살던 데를 떠나온 뒤로, 그들 가족은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아이는 왜 부모가 굳이 이곳을 골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땅은 하루도 쉴 틈 없이 줄곧 주룩주룩 비가 왔다. 그리고 비가 오면 늘상 천둥이 쳤다.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이제는 은근히 성이 났다.

거기다, 새로 집을 찾은 뒤에도 아이의 부모는 오히려 떠돌아다닐 때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글쎄, 대국 사람들이 이번엔 또⋯,”
“쉿, 애가 듣겠어. 들어가서 말해.”

부모는 아이에게 숨기는 것이 많아졌다. 아이는 여기에도 심통이 일었다. 그도 어엿한 가족인데, 왜 그만 혼자서 몰라야 한단 말인가? 아이는 잠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이가 안쪽 방에 발걸음을 내딛자, 부모는 이야기하다 말고 흠칫했다.

“그러니까⋯, 엇! 언제 깼어? 엄마가 다시 재워 줄까?”
“또 나만 빼고 뭔 얘기 해?”
“그런 거 아냐. 얼른, 얼른 들어가자.”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아 방으로 이끌었다. 작은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면서 토닥였다. 아이가 토라진 듯 말했다.

“얼마나 크면 알아도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래도.”
“거짓말⋯.”

아이는 잔뜩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결국은 어린아이라, 포근한 곳에 얼마 있으니 금세 스르르 잠이 들었다. 엄마는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불을 확인한 뒤 방을 나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잘 자라, 우리 나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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