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편 뒤에서는 언제나...
“호카게님. 거듭 말씀드렸지만, 전쟁 중임을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에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나이는 하등 의미가 없습니다. 닌자 세계에선 성장도 죽음도 빠르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런 때라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용돌이 서클렛은 더더욱 의미가 없습니다. 번성했던 마을이 단 반나절 만에 증발해 버렸습니다. 그런 혼란한 와중에 고작해야 그 서클렛 하나가 그리 귀할 일이 무어 있습니까? 이미 사방에 그 서클렛을 쓴 닌자들의 시체가 그득했을 겁니다.”
“호카게님, 부디 신중히 생각해 주십시오. 신분도 확인할 수 없는 외부인을 함부로 이 마을에 들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중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계속 말했다. 히루젠은 한 음절 한 음절을 놓치지 않으며 깊게 골똘했다.
“우리는 소용돌이를 버렸으나, 결국 조약과 서류의 영역에서까지 온전히 끊어낼 시기는 잡지 못했네. 소용돌이는 마지막까지 나뭇잎의 동맹이었고, 저들은 그곳의 유민이야. 비밀리에 감시와 통제를 유지하거나 늘린다면 몰라도, 우리가 저들을 내칠 만한 명분은 보이지 않는군. 그대들 뜻은 어떠한가?”
“전쟁과 쟁패에 예나 도의가 존재했다면, 지금과 같은 날이 왔을 리도 없지요.”
익숙한 말에 히루젠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 내뱉은 닌자 옆에는⋯, 단조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닌자로서, 전쟁과 쟁패에도 정말로 예와 도의가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걸세.
자중하겠단 말은 지킬지라도 아예 처음부터 물러설 수는 없던 모양이었다.
‘젠장, 단조. 넌 참으로 좋겠군. 이리 훌륭한 제자들이 있다니.’ 히루젠은 생각했다.
“그 말이 옳소. 호카게님, 명분은 늘 만들어지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혹여 세간에 퍼뜨려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둘이 소용돌이를 공격한 적 쪽 사람임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고 해명하면 그만입니다.”
“맞습니다. 일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만에 하나 저들이 정말 적이 맞다면 그 여파는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성벽이 튼튼해도 안에서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호카게님.”
“게다가, 저는 설령 소용돌이 주민이 맞더라도 위험하다고 봅니다. 나뭇잎에 반감을 느낄 이유가 충분하니까요. 설마하니 우리가 손을 떼는 걸 소용돌이라고 몰랐겠습니까? 세가 기우니 명목상 연줄이라도 지키려 침묵을 택했을 뿐, 안으로는 얼마든지 이를 갈았을 겝니다. 와중에 이런 일이 닥쳤으니, 그 원망이 어디로 갈지는⋯. 짐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사실, 저는 이 일이 이리 오래 끌 만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 정보부에 지시를 내리면 간단한 일이 아닙니까? 정보부는 그간 무엇을 했소?”
화살이 순식간에 정보부대장에게로 쏠렸다. 그는 불쾌한 듯 대답했다.
“우린 이미 명령을 받아 시도해 보았소. 그것도 지난 며칠에 걸쳐 여러 번이나. 그런데 그자들의 뇌는 어떻게 된 것인지, 술법으로 파훼 가능한 형태가 아니었소. 이리저리 엉키고 뒤섞여 알아볼 수조차 없더이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확실한 것은 술법을 쓸 때마다 늘 그 둘의 뇌가 함께 나타났고 하나로 이어진 모습이었다는 거요. 그뿐이오. 애초에 그들이 제정신이 맞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할 문제요.”
“아니, 최호 전심이 통하지 않는다니요⋯.” 한 닌자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절대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증거지요. 분명한 위험인자입니다. 제거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닌자들의 시선이 히루젠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는 고민하는 듯 손짓하더니 말했다.
“그대들 말은 모두 맞아. 하지만 나는 처음 말한 대로 그들을 우리 손안에 두는 길을 택하고 싶네. 그들에게서 가치를 보았기 때문일세.”
“그 가치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호카게님?”
“정확히는 쓸모이지. ‘타로’가 엄청난 회복 속도를 보인단 걸 아나? 일반적인 경우의 대여섯 배에 가깝다고 하더군. 피부 절반에 한 눈, 양쪽 폐를 모두 절제해 교체한 그런 몸이 말일세.”
“결론은 그자의 차크라가 아주 특별하단 걸세. 스스로 치유력을 타고난 차크라라. 일단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전력이 되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의료 닌자는 늘 부족해 여기저기 고충이 많지 않나. 훈련을 거쳐 그 능력을 타인에게 사용할 수 있다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할 것이네.”
“호카게님 말씀에 더해, 본인은 유사시 타로를 제어하는 데 ‘코’를 이용할 수 있다고 보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말이오. 다들 사쿠모 상닌에게도 설명을 듣지 않으셨소. 타로가 코를 보호하는 모습으로 발견됐고, 이송 당시에도 조카라 했다고. 제아무리 강한 자라도 가족에 묶인 정은 쥐약 아니겠소.”
나라 가문 당주가 거들었다.
“좋은 생각이네. 또 무엇보다도 나뭇잎이 소용돌이 터에서 사람 두 명을 찾아 데려갔다는 정보가 이미 암시장에서 돌고 있네. 우리는 이미 결단을 내리지도 않고 소용돌이가 스스로 스러져 주길 빌었는데, 그 유민일 수 있는 이들을 의심만으로 없앤다면 나뭇잎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깎여 나갈 텐가? 이참에 그들을 포용하고 잘 사용해서 적어도 우리가 마지막은 책임졌음을 보여주는 편이 낫지 않겠나.”
히루젠이 말하자 한 닌자가 반박하고 나섰다.
“말씀대로 분명 신뢰 자산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들 예민해져 있습니다. 마을에 받아들인다 해도 적응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설사 선인이라도 마음이 어떻게 바뀔진 아무도 모르지요. 그때 가서 다시 내쫓거나 죽이길 고려할 수도 없고, 혹 일이 터진다면 너무 늦습니다. 처치 곤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히루젠이 답했다.
“소용돌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사정은 비밀에 부치고, 충직한 닌자를 이웃으로 붙일 생각이네. 주민들 간 의심을 덜고 섞여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에도 말했지만 경계는 나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네. 퇴원 후 감시를 더욱 늘리고,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레 행동을 통제하는 계획이 필요할 걸세. 물론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그 닌자는⋯.”
“익히 알겠네.”
한 닌자의 말을 끊고 단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호카게의 뜻이 확고한가 보오. 이만 신(臣)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어떠한가.”
히루젠, 단조를 포함해 회의실 안 모든 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상해진 공기를 비집고 먼저 물꼬를 튼 것은 창밖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새 울음소리였다.
“중앙 병원에 은밀히 내릴 정식 지시 사항에 관한 논의가 남아 있네. 시작하도록 하지.”
히루젠이 말했다.
“놀랍긴 하네.”
“내 실력 끝내주지?”
“너 말고 타로 군 말한 거였는데.”
“야, 그래도 어차피 가망 없다며 이식 안 하겠단 거 죽어라 뜯어말리고 수술대로 올린 사람은 나거든?”
“어련하시겠어요. 뭐, 조금 인정할 만은 하네.”
하얀 가운을 걸친 두 젊은 닌자가 여기저기 사진이 붙은 커다란 표를 눈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칠판을 두 개나 덮고도 남은 방대한 자료 속 주인공은 두 달 전 이 병원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문제의 환자. 환자 번호 61904. 타로 군이었다. ‘군’이라는 호칭이 그새 또 언제 붙었는지는 몰랐지만.
“몸을 아예 한번 뒤엎었고, 고작 두 달인데 덜 다쳐서 들어온 코 쨩이랑 회복 수준이 비슷해? 이쯤 되면 좀 무서워. 진짜 핏줄이 엄청 대단하기라도 한 건가.”
“우즈마키라고 하지 않았어?”
“우즈마키일 수도 있다고 했지. 너는 담당이란 놈이 그런 걸 또 어디서 줏어 먹었는진 모르지만 과대포장이야. 좀 흘려들어.”
“어차피 우즈마키고 뭐고 우린 젊은데다 말단이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뭐. 난 거기 이름도 가물가물해. 소용돌이 마을이랬던가?”
“맞아, 그런데⋯.”
닌자 중 한쪽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친구-타로의 담당-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조곤조곤 귓속말했다.
“말 좀 조심해서 하는 게 좋겠어.”
“내가 뭘? 야, 설마 소용⋯.”
“그러니까, 그런 말 좀!”
“야, 무슨 단어 하나 말한다고 큰일 나면 닌자 중에 무사할 사람이 어딨어?”
“고참들 하는 말 좀 엿들어 보면 그거 절대 훈훈한 얘기 아니거든? 그때 그렇게 지령도 내려오고, 난 신경 쓰인다고. 자칫하다간 나까지 같이 엮여 들어가게 생겼잖아. 난 앞날이 창창한데.”
“얼씨구.”
“내 말 제대로 들었어?”
“네 말을 내가 제대로 듣고 말고는 넘겨 두고, 지령이 그렇게 생각나면 시계나 봐. 너 어디 가야 할 데가 있지 않냐?”
“시계가 뭐⋯. 이런 씨.”
딱 봐도 저녁 시간으로는 한참 늦은 때였다. 타로의 담당이 야비하게 배시시 웃었다. 그는 노래하듯 가락을 붙여 말하며 놀려댔다.
“지령 첫 번째. 친근감 형성에 힘쓸 것. 그리하여 담화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할 것. 친근감 형성 과정에는 대표적으로 식사 자리 함께하기 등이 있고, 그리고 네 담당은~”
“그래, 코 쨩이지!! 아, 젠장⋯. 왜 말 안 했어?!”
코의 담당은 어느새 옆에 잊혔던 죽 접시를 들고 쏜살같이 뛰어 사라졌다. 오래된 미닫이문이 거친 손길에 폭탄 같은 소리를 냈다가 끽끽대며 스르르 닫혔다. 혼자 남아 그 광경을 지켜보는 타로의 담당이 허탈하게 말했다.
“치료 계획 쓰는데 갑자기 내 것도 아닌 밥 들고 와서 별것도 아닌 말 걸면 당연히 짜증 나서 엿이나 멕이고 싶지. 하여간 이상한 새끼야.”
한편 코의 담당은 쉴 틈 없이 달려 간신히 해가 지기 전에 병실로 발을 내디뎠다. 역시 낡은 문에 힘 조절이 안 되는 급한 손길은 어마어마한 소음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라다는 느닷없이 난입해선 거의 주저앉아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숨만 몰아쉬는 닌자를 황당한 눈길로 쳐다봤다.
“어어, 얘야. ㅈ, 저녁 식사! 응?”
그러면서 한 손으로 접시를 높이 추켜드는 모습은 더욱이 황당했다.
담당은 접시를 올려주고 의자 하나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그는 아이가 식사하는 모습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런 연유로 사라다는 이 병원 안에서 가지는 식사 시간이 가장 혐오스러웠다. 목적을 품은 시선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라니. 늘 본인 임무에 충실한 고양이 가면 속 검은 눈동자도 언제나 거슬렸지만, 이 닌자들의 기대감을 품은 눈길도 만만치 않게 거북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지나면, 말 그대로 삼위일체를 완성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저기 얘야, 음, 그러니까, 계속 ‘얘야’라고 하기도 뭔가 좀 어색한데. 혹시 이름은 말해 주고 싶은 생각 없어? 아직도 별로 마음이 안 드니?”
이 틀은 빗겨나가는 법이 없었다. 사라다는 듣는 척 마는 척하며 계속 죽을 넘겼다. 젊은 담당 닌자는 숨겨 보려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동거지에서 조급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미 스무 살, 생사를 수없이 드나든 상급 닌자로서 사라다는 저 중간에 끼인 기분을 잘 알았다. 전부 다 당연히 거쳐야 할 일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사라다는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 참으로 아니꼽기 짝이 없었다.
‘한쪽은 포승줄로 묶어 두기라도 해야 만족하겠고, 또 한쪽은 어르든 달래든 귀여움받는 어린애를 만들어야 만족하겠고. 나더러 뭐 어쩌란 거야?’
고양이의 시선은 언제고 그 두 눈을 직접 찔러버리고 싶을 정도로 따가웠다. 게다가 티만 안 냈을 뿐이지 사라다는 이미 감시가 적어도 둘은 더 붙어 있음을 눈치챈 뒤였다.
고양이는 무기를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고, 아마 나머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들은 혹여 사라다가 수틀리게 행동한다면 언제든 기꺼이 숨통을 끊을 것이다.
의료 닌자들은 온갖 감언이설을 읊으며 그가 품 안에 들어오길 바랐지만, 정작 감시를 잠시 물리는 수고조차 없었다. 그러다 또 수확 없이 나가게 되면 제멋대로인 애를 알게 모르게 한번 째려보고 떠났다. 늘 구역질이 났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라는 건지, 사라다는 연신 짜증만 일었다. 응하고픈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가 알고 또 그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 곁에 없었다. 사라다가 이들을 무시하는 데는 저 은근한 독촉에 응해 주기 싫은 탓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때문이었다.
50년 전이라, 사라다는 무엇도 알지 못했고 이곳에 이어진 인연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호카게였고, 숱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테며, 이 시대 사람들 몇과는 직접 알기도 했다. 앞으로 함께 수십 년을 버텨야 할 이로서 그 없이는 계획을 짤 수 없었다.
‘그러니 인내해야지. 당신들이나 나나 인내가 필요해.’
사라다는 다시 한 숟가락을 입에 떠넣었다. 그렇게 담당이 옆에서 영 안절부절못하는 말은 이번에도 모두 깔끔히 묵살당했다.
죽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숟가락이 그릇을 긁으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우리도 이제 힘든데⋯. 응?”
담당은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사라다는 여전히 고개 한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숟가락만 내려놓았다. 담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예 듣는 척도 안 하지. 참.”
담당은 결국 접시를 도로 잡아 들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역시나 한번 눈을 흘겼다. 앞날을 예상하고 무거운 마음에 신발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름 시끄러웠으나 사라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두 손에 주목했다. 어느덧 붕대를 푼 지 꽤 된 손은 여전히 단단하게 자글자글했다. 하지만 아까 보니 이제는 숟가락을 잡을 때 떨림이 없었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날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몸은 어린 시절로 귀환했으나 일을 겪으면서 또 변하여 옛날 그 우치하 사라다라고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흉터로 몸 이곳저곳이 주름져 돌출되고 색이 변했는데, 특히 눈썹은 더는 예전처럼 자랄 일이 없을 듯했다. 전부 밀어버린 머리카락도 이제야 군데군데 까슬까슬하게 올라왔다.
놀란 점은 다른 데 있었다. 그가 이미 5년 전 얻은 만화경 사륜안이 사라지고, 단구옥으로 새롭게 돌아간 점은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이 사륜안은 오직 왼쪽 눈뿐이었다. 오른쪽 눈은 평범하게 비어 있었다. 이 이유만은 사라다로선 어찌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분은 아시려나.’
아버지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알까. 한 사람이 더욱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사라다는 정신을 더듬어 한 곳으로 향했다. 긴 시간 끝에 마침내 무엇인지 해석해 냈던,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 그의 심상 세계. 그리고 그들의 심상 세계였다. 하나로 이어진 곳이었다.
사라다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타지의 마지막 우즈마키에게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쿠시나는 강가에 앉아 물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맑고 투명한 아래 이끼가 붙은 돌이 그대로 드러났고, 이따금 때 이르게 꺾인 이파리가 물살을 따라갔다. 미풍이 불자 쿠시나는 눈을 깜빡였다.
지난 두 달여 간은 하루하루가 정말 억겁같이 길었다. 눈을 뜰 때마다 순간적으로 깨닫는 공허감을 피하기 어려웠고,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허망한 삶들이 떠올라 그대로 멍하니 굳어 버렸다.
유일하게 같은 고통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미토 곁에서야 그나마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노부인의 품에 안겨 함께 웃고, 말하고, 그러다 한껏 울어주고 나면 비로소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었다.
미나토도 늘 옆에 있었다. 물론 그는 소용돌이에 연이 없는 고로 이 아픔에 관해 보다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신 미나토는 항상 쿠시나를 현실로 끌어올려 주는 역할을 했다. 쿠시나는 미나토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힘들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모르는 사이에 아주 조금씩, 조금씩 덜해져도 갔고, 넘쳐 흐르려는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새로운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미수를 옮겨 받는 날이 이제 이레밖에 남지 않았다. 그 이틀이 지나면 쿠시나는 다시 한번 헤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운명을 맞아들여야만 한다. 그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은 이미 자명했다.
가장 크고 넓었던 보호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전에는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파도가 그를 덮칠 것이다. 그래서 쿠시나는 두려웠다.
또한 미수가 빠져나가면 인주력은 숨을 거둔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쿠시나는 실제 일이 어떻든 자신 때문에 미토가 죽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아직 예전 것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런 슬픔과 죄책감을 어찌 달래야 할지. 쿠시나는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전부 다 잘 된다면⋯.’
쿠시나가 생각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얼굴을 덮었다. 쿠시나는 손으로 붉은 실타래를 쓸어 넘겼다.
‘미토 님께 가자.’
쿠시나가 발걸음을 떼었다. 계속 이러고만 있기에는 그들 사이에 남은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했다. 아이의 움직임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충실한 그림자 하나가 멀리서 예비 인주력의 동향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