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울 위 사람들
환자 번호 61958, 일명 코(子) : 8세 가량 여성. 전신 화상. 흉터가 남겠으나 외과적 처치를 고려할 수준은 아님. 열기와 매연으로 인한 호흡기 손상-음성 장애 발생 예상, 후두 협착으로 수술 진행 예정. 의식은 혼미하나 자극에 반응. 현재 소통은 불가하며 그 외 특이사항 없음.
환자 번호 61904, 일명 타로(太郞) : 연령 불명 남성. 전신 화상. 인술을 동원해도 상당 부분 자연 회복 불가. 머리, 등, 양팔을 포함 반신에 피부 이식 진행 중. 차후 좌측 안구, 양 폐 이식 및 안면 재건술과 후두 협착 치료 수술 진행 예정. 음성 장애 발생 예상. 의식 불명.
히루젠은 긴 보고를 차근차근 머릿속에 정리했다. 두 객의 사정은 기대를 내려놓은 치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특히 타로라 이름 붙인 남자가 더욱 그랬다. 번성한 마을을 전소시켰다는 대화재는 민(民)에게 더욱 무자비했던 모양이었다.
호카게의 앞에 선 의료 닌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타로에게서 조금 의문스러웠던 부분은, 자가 호흡을 하고 의식을 유지하면서 실려 왔다는 겁니다. 폐와 기도가 그을리다시피 망가졌고, 그보다도 상처 자체가 진작 쇼크사로 넘어갔을 수준인데 말입니다. 거기다 듣기로 기둥 아래 몇 시간은 깔려 있었을 거라 하던데⋯.”
“아마 우즈마키 일족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지만, 본 시간이 길지 않고 신체 손상도 심해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직 수술도 끝나지 않았고요. 그런데 워낙 상태가 상태인지라, 계속 지켜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외는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히루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사 진인사대천명인 것은 어쩔 수 없지. 부디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네. 그리고 두 사람이 숙질(叔姪)간이라던데, 혹 코에게도 그 타로와 비슷한 힘을 띠는 모습이 보이는가?”
“그것이, 사쿠모 상닌을 비롯한 특편부대원들은 조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지만⋯, 저희가 봤을 때 분명한 혈육이라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차크라의 양상이 워낙에 서로 달라서 말입니다.”
“그러한가⋯. 모두 알았네. 보고는 계속 올리도록.”
“예, 호카게님.”
히루젠이 일어섰다. 병원은 한창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복도로 나서자, 아닌 척해도 공기 사이로는 작게 수군대는 소리가 조금씩 섞여들었다.
히루젠은 그 가운데를 무표정한 얼굴로 지났다. 번잡한 생각이 도움이 될 때는 아니었다. 지금 그는 계획에 골몰해야 했다. 마을의 두 손님을 어떻게든 우선 보호할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현재 두 사람은 그들이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았는지와 같은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신원. 단 두 음절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소용돌이 마을 안에 있던 기록물은 멸망과 함께 일어난 대화재로 완전히 잿더미가 됐고, 그 안에서 살아 나뭇잎으로 온 사람은 이 두 명뿐이었으며, 도망치는 데 성공했을 다른 이들은 지금 어딨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둘 중 누구도 기꺼이 질의응답에 나설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현재 이 세상 어디에도 그 두 사람의 신원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불명인 저 둘은, 어떤 이들의 방식을 따르자면 그저 위험을 품은 적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좋은 모습은 보지 못할 테다.
히루젠은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저들이 스스로 말하고 그들이 판가름할 기회는 있어야 했다. 그래 불안만으로 낯선 이를 단정 짓는 섣부른 결단은 막아야 했다.
어느덧 집무실이 가까웠다. 문 앞 낯선 존재에 히루젠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면을 쓴 한 닌자가 웬일인지 모습을 드러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히루젠은 닌자의 손에 곱게 접혀 들린 하얀 종이를 발견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서자 닌자는 조용히 공손하게 종이를 올렸다. 히루젠이 받아 펼쳐 보니 그것은 과연 쪽지였다. 짧은 문장은 익숙한 필체로 유려하게 쓰여 있었다.
곧 이야기하세.
단조.
확실히 그리 반가운 내용은 못 되었다.
히루젠이 안으로 들어섰다. 시계가 줄곧 어림했던 바로 그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작게 손짓하자 곧 어디선가 얼굴을 가린 닌자가 방안에 속속들이 나타났다. 히루젠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뒤 말했다.
“‘우체부’들을 불러 모아라. 이젠 시간이 됐어.”
어쩐 일인지, 이 초저녁 경에 미토는 갑자기 말도 없이 쿠시나를 불러냈다. 쿠시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바로 차림을 하고 나섰다. 뛰는 중 약간 재주를 부려 발을 빨리 놀렸더니 거의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밝게 인사하는 쿠시나를 아무 말 없이 들여 앉힌 미토는 차를 한 잔 따라 건네주고, 자신 역시 그 앞에 앉아 잔을 들었다.
차는 어떻게 한 것인진 몰라도 익숙한 쓴맛 대신 시원하고 부드러운 향이 났다. 쿠시나의 눈이 약간 커지는 모습을 본 미토가 작게 웃음 지었다.
쿠시나도 따라서 입꼬리를 올려 보였지만, 마냥 계속 그러할 순 없었다. 아직 아카데미생인 그라도 노부인의 주름진 눈가에 서린 슬픔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어, 미토 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쿠시나가 어렵게 용기 내어 말을 꺼냈다. 미토는 대답하는 대신 잔을 내려놓고 쿠시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쿠시나, 이리 온.”
쿠시나는 의아했지만 일단 그대로 가 안겼다. 미토가 두 팔과 너른 소매로 쿠시나의 몸과 머리를 감싸 안고 부드럽게 토닥였다.
‘아까부터 말씀도 없이 왜 이러시는 걸까?’
정말로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임에도 쿠시나는 갈수록 불안해지기만 했다.
“운명은⋯, 삶은 분명한 우리 것, 우리가 스스로 열어 가야 마땅한 것이야. 하지만 어떤 때는⋯, 정말로 크고 억센 것이 있어서, 어찌할 겨를 없이 우리를 한순간에 쓸어가 버리기도 하지.”
쓸어간다? 겨를도 없이? 분명히 좋은 말은 아니다. 무슨 뜻일까? 쿠시나는 혼란스러웠다.
“슬픈 소식이 왔단다. 아주 슬프고, 비통한. 이 늙은 몸이야 이미 겪은 일이 너무 많아 견딜 만 하다지만, 네 심정은⋯, 무어라 짐작하기도 힘들더구나. 그러다 이런 힘없는 노파라도, 그래도 곁에 누구 하나 있는 편이 혼자보다는 낫지 않겠나 싶었단다. 그래서, 지금 너를 이렇게 부른 것이야⋯.”
미토가 옆에 놓여 있던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풀을 발라 닫은 봉투는 하얀색으로 아주 깨끗하고 빳빳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같이 보련?”
“아, 아니에요. 저 혼자,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쿠시나가 허둥지둥 봉투를 건네받았다. 어쩐지 이 일은 오직 혼자서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봉투 입구는 힘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쉽게 뜯어졌다. 안에서 반듯하게 여러 번 접힌 종이가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왔다.
종이를 펼치고 나면, 가장 먼저 호카게의 붉은 도장이 눈에 들어왔다. 두 눈동자가 서서히 검은 글자를 따라 굴러갔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쿠시나는 종이를 도로 곱게 접어 손에 들었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거지? 머릿속이 너무 어지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토가 입을 뗐다.
“쿠시나,”
“미토 님.”
쿠시나가 말을 끊었다. 아이의 얼굴은 아주 차분했고, 두 눈은 초하루 밤처럼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럼 이제 소용돌이 마을은 없는 거네요.”
미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침묵을 유지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전 이제⋯,”
쿠시나가 말을 더듬었다. 몸이 서서히 떨려 왔다.
“아으, 죄송해요, 근데 전⋯,”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곧 거의 솟구쳐 어찌할 수도 없게 되었다.
“저는⋯,”
쿠시나는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정신이 없어 신발을 똑바로 꿰어 신기는 했는지도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 쏠릴 신경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쿠시나는 달렸다. 숨이 차오르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아주 번잡하고 낯설었다. 닌자들이 호카게의 긴급 공문을 전하기 위해 집집마다 분주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쿠시나는 그 광경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소용돌이 마을은 멸망했다.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닌자의 빠른 발로도, 무슨 수를 써서도 다시 갈 수 없다.
쿠시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쿠시나는 달렸다.
넘어지고 굴러 흙투성이가 되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달리고 달렸다. 그렇게 세상에 오롯이 본인 혼자만 남기라도 한 양 계속 달렸다.
그렇게 지친 근육이 뻣뻣해지고, 석양 아래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쿠시나의 앞에 갑자기 무언가가 나타났다. 노랗고 밝은 그것에 정통으로 부딪혀 그대로 겹쳐 넘어지면서, 마침내 쿠시나의 발도 질주를 멈췄다.
아픔을 예상하며 몸을 웅크렸던 쿠시나는 폭신한 천이 닿는 감각에 눈을 떴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니 두 팔이 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갑자기 떨어진 그 무엇은 바로 사람이었다.
쿠시나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그는 금빛 아래 투명한 푸른색과 마주했다.
아, 미나토.
“아으, 쿠시나⋯, 괜찮아? 신발도 벗겨졌는데 모르는 것 같아서 놀랐잖아. 혹시 방금 아팠으면 미안해⋯.”
신발? 쿠시나의 시선이 돌아 하반신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시간 만에 자신의 발을 제대로 본 순간, 쿠시나는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분명 아무 느낌도 안 났는데⋯. 대체 언제부터 이랬지?’
신발은 언제 벗겨졌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이 드러난 맨살은 긁히고 까져 붉게 비치는 것은 물론이요, 무엇을 밟았는지 제대로 베여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곳도 있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몰랐다니⋯.
상처를 인지하고 나니 지금껏 무엇도 느끼지 못했던 곳에 아픔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쿠시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쿠시나를 받아내며 땅과 직격으로 부딪친 충격을 삭히던 미나토는 그 모습을 잡아채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많이 아프지? 얼른 병원 가자. 데려다줄게.”
쿠시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상처투성이인 발을 몇 초 동안 가만히 쳐다본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마워.”
미나토는 한 손으로 쿠시나의 등을, 반대 손으로 무릎 밑을 부드럽게 받치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해가 서서히 내려가는 나뭇잎 마을 공중은 고요했다.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부풀리고 온몸을 감쌌다.
가는 도중에는 종종 나무나 돌담 따위를 딛는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 때가 꿈속마냥 포근하고 조용해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 세상에 오롯이 본인 혼자 남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옆에는 바로 이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익숙한 자세, 익숙한 느낌이었다. 쿠시나는 멀지 않은 옛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도. 늘 이랬다.
쿠시나는 한 손을 들어 미나토의 얼굴을 가볍게 건드려 보았다. 미나토가 곧바로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시선을 맞춰 오며 물었다.
“왜 그래, 혹시 많이 아파? 좀 더 빨리 갈까?”
“아니, 그냥⋯.”
쿠시나가 손을 내렸다.
“너는 언제나 나를 찾아내는구나, 싶어서 말이야.”
미나토는 순간 조금 놀랐다가, 금세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소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잖아. 이런 예쁜 머리카락은,”
“못 찾기도 어렵다니깐, 안 그래?”
“맞아!”
두 소년의 옅은 웃음소리가 섞였다. 쿠시나는 밝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얼마 못 가 그쳤다.
아까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더니, 지금은 또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래도 될까?
그는 바로 오늘 뿌리를 잃었다. 그에게는 이제 뿌리가 없다. 돌아갈 곳도 받아줄 곳도 없다. 동시에 그는 살아남았다. 도구로서 끌려온 이곳에 있었기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은 죽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나토.”
쿠시나는 미나토를 올려다보았다. 침묵이 꽤 오래간 계속되었다. 그러자 어린 얼굴에는 한눈에 보아도 걱정이 역력하게 서렸다.
알 수 없었다. 쿠시나는 알 수 없었다. 일련의 질문은 열 살 아이가 스스로 답하긴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다만 그는 일단 기대고 싶었다. 바로 여기, 그의 곁에 사람이 있는 곳에서, 어떤 크고 억센 것이 그를 쓸어가지 않길 바라며⋯, 함께 의지하고 안아 주며.
“늘 고마워.”
어느새 병원이 눈앞에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사라다는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현실에서인 듯이 그리 표현하긴 어려웠다. 지금 사라다가 보는 것은 사방에 흉측하게 뿌리내린 신목들, 그리고 이미 한참 전 뒤에 두고 온 그런 사람. 어떻게 봐도 환상이나 꿈속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다는 눈을 끔뻑였다. 오른쪽 얼굴을 눈꺼풀을 지나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 사제관계를 상징했던 가른 서클렛과 어두운 망토, 쿠사나기 검. 짙은 혈연을 보여주는 금색 머리와 한쪽 푸른색 눈. 마지막으로 오직 그만을 뜻했던 연청색 홍채.
우즈마키 보루토를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을 그는 꿈에도 몰랐다. 퍽 처참한 배경과 침울한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그날 같았다.
그날, 보루토는 사라다와 만났다. 그는 지난 세월을 대신하듯 아주 길게 말했다. 그간 감춰 두었던 모든 것을 기꺼이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보루토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대로 박혀 버린 쿠나이와 피부 틈새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무슨 이유인지 사라다는 두 눈을 뜬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던 기억이 났다.
‘악몽이네.’ 사라다는 생각했다.
가만히 신목을 바라보던 ‘보루토’가 돌아서 입을 떼었다. 사라다는 그저 잠자코 들었다. 그간 너무 많이 생각해서 이미 전부 외워 버린 이야기들이었다.
조용하고 잔잔할 거야. 그리고 아주 느리겠지. 하지만 이 세상은 분명 끝나. 일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게 되는 거야.
사실은, 늘 나였잖아. 아빠도, 우리 가족도, 우리 친구들, 거기다 나까지 전부 포함해서. 다 내 손 밖으로 흘러나가 버렸어. 하나하나 모두 나였어.
후회할 일이 많아. 만약 지금 내가 알고 생각하는 걸 옛날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았을까?
부탁할게. 정말 염치없지만, 나는 여기서 끝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일순 공간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사라다는 조금씩 몸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생각했다.
‘일어나야 하나.’
그때 사라다는 두 손을 조심스레 모아 쥐었다. 이상하게도, 사라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머리는 그래야만 한다 느꼈고, 몸은 자연스레 움직였다. 사라다는 의아했다. 그사이 또 한 의문이 어지러운 생각을 강타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지?’
하소연할 길 하나 없이 가슴속에 얹힌 이 기분은 대체 무슨 원유로⋯.
어느새 주변은 완전히 무너져서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사라다는 그 속에 홀로 가라앉았다.
미안해.
날이 살을 뚫는 질척한 소리가 귀 안에 고였다. 사라다는 눈을 감았다.
‘너는 왜 그리 망가져야만 했을까. 차라리 널 원망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라다는 다시 눈을 떴다. 풍경은 어느덧 바뀌어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잠시간은 그렇게 느껴졌다.
곧 등 뒤가 환하게 밝아 왔다. 익숙하다가도 낯설었다. 하지만 줄곧 그리웠다. 사라다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사라다는 뒤돌아보았다. 크고, 환하고, 따뜻했다. 주홍 색깔은 기억과는 달랐고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으나, 그는 결국 그였다. 알아보지 못한다는 길은 사라다에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빛과 마주했다.
“저는 용서를 구하겠어요.”
“받아 주시라는 뜻은 아니에요. 저를 멀리하고 미워하셔도 회피하진 않아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사라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으로 빛의 끝자락을 힘겹게 부여잡았다. 청년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맴돌았다.
“그런데, 변명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손에 남은 거란 게 이런 지푸라기밖에 없었어요. 전부 너무 간절했어요. 제정신일 수가 없었어요⋯.”
사라다는 꽉 억눌린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끝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끝을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그가 몸부림치며 오열하는 소리만이 웅웅 울렸다.
“죄송해요, 아, 아으,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 시간은 기회여야만 했어요.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곳마저 다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조각이 사라지려 하자 사라다는 자락을 끌어안았다. 마지막 눈물이 밖으로 떨구어졌다.
죄송해요. 저를 떠나지 마세요⋯.
그리고, 사라다는 마침내 눈을 떴다. 악몽을 꾸다 깨듯 숨이 거칠게 나갔다 들어왔다. 심장이 핏줄을 타고 마구 달리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이윽고 사라다는 자신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음을 깨달았다. 눈을 위로 올리자, 이상한 고양이 가면 속 검은 눈이라는 꽤 놀랄 만한 광경이 존재했다.
그러나 예민한 감정 속 놀람은 오히려 순식간에 짜증으로 승화되었다. 사라다는 기겁하는 대신 그대로 쏘아보았다. ‘고양이’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완전히 일어난 건가?”
“-”
그럼 일어났지 설마 죽어 있겠어? 흥분해서 날카롭게 응수하려던 대답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대신 애처로운 바람 소리만이 비실대며 사이를 채웠다.
사라다는 순간 하얗게 질렸다. 그는 이제야 깨어난 직후부터 은근히 목 주변을 맴돌던 기묘한 감각을 알아챘다. 아픔이었다. 목이 갈기갈기 찢어지기라도 하듯 아팠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목을 향하려 했다. 그러나 겹겹이 두꺼운 붕대와 찌르는 듯한 느낌이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기침을 내뱉고 싶었지만, 더욱 고통스러워질 것을 알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라다는 얼굴을 찡그렸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두고도 그저 구경만 하는 꼴에 더욱 역정이 날 찰나, 누군가 다른 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양이가 고개를 들었다.
목을 돌리기 어려운 탓에 사라다는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뒤에야 그 정체를 확인했다. 흰 가운을 걸친 것으로 보되 아마도 의료 닌자였다. 그들이 사라다의 상태를 확인하려 들자, 고양이가 먼저 선수 치듯 말했다.
“말을 못 해.”
“⋯그럴 줄 알았지. 설마하니 멀쩡할 리가, 참⋯.”
닌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린아이의 신세를 안되게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부터 또 다른 압박에 시달릴 본인의 처지가 갑갑한 것일까. 적어도 사라다는 한쪽을 생각했다.
‘이제 다들 내 입을 열고 싶어 하겠지.’
슬슬 머리가 아팠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닌자는 태연히 말을 걸어왔다.
“혹시 내 말이 들리면 눈을 한 번, 아니면⋯.”
“잘 듣던데.” 고양이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 참 다행이네. 다행이고, 아무튼, 얘야. 여긴 나뭇잎 마을이야. 우리 쪽에서 널 발견해서 여기 데려왔고, 지금 치료하는 중이야. 오늘은 이제 2주째인데, 상처는 어디 덧난 곳 없이 잘 낫는 것 같고. 목을 다친 데를 수술해서 당분간 좀 힘들 수도 있는데, 혹시 뭐 써서라도 얘기하고 싶은 게⋯?”
뒤에서 다른 이가 조용히 종이를 꺼내 보였지만, 사라다는 별 반응 없이 시선을 내렸다. 닌자는 손을 뻗어 종이를 도로 넣게 하며 말을 이었다.
“⋯없구나. 알았어. 혹시 생기면 언제든지 도와줄게. 고생이 많네.”
그리고 닌자는 고양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봐,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바로 재깍재깍 전해야 해. 알지?”
“그건 내가 제일 잘 알걸.”
고양이도 무덤덤하게 답했다. 닌자는 잔뜩 질린 표정을 짓고 일행들과 함께 되돌아 나가 버렸다. 곧 다시 두 사람만이 남고, 침묵 속에 사라다는 방금 그 닌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싶어졌다.
이런 괴상한 감시역과, 이토록 불안한 한 방 생활이라니. 이제 시작일 뿐인데도 벌써 앞날이 아득했다. 이보다 더 피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라다는 속으로 푹 꺼지는 한숨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애써 주변의 모든 것을 무시했다. 어차피 사라다는 다른 곳으로 다시, 깊이 들어가야 했다.
꿈에서 깨던 그 마지막 찰나를 말이다.
사라다는 다시금 떠올렸다. 그 순간, 그는 빛에 감싸졌고 빛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분명한 음성이 놀란 몸을 감쌌다. 아, 그는 역시 잊을 수 없었으니⋯.
나는 너를 다시 볼 거란다.
사라다.
나루토는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가 떠난 자리엔 아무 흔적도 없이 고요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나루토는 가만히 서 있었다.
조용한 겉모습이었으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나루토는 밋밋한 한 겹 옷 위로 평평한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에게 마지막 기억은 분명 심장이 꿰뚫려 터지는 감각이었다.
무엇도 분명하지 않았다. 짧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던지. 슬픔, 아쉬움, 미안함, 간절함⋯. 그 모든 강렬한 감정이 고통과 깊게 섞여 기억을 가로막았다. 필시 중요한 순간이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는 불 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말 그대로.
나루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낯익은 공간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왔다. 스러져 가는 아수라장 속 소용돌이 마을로.
‘꿈으로 돌아가는 거야.’
도망치던 한 사람이 떨어지는 잔해에 맞아 그의 옆으로 쓰러졌다. 미동이 없어진 몸에서 금세 붉은 액이 흘러나왔다.
이때 나루토는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뇌리에는 본능조차 없이 그저 깜깜하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 누구인지는 물론,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사방에 시체가 가득하고, 보이는 것엔 모두 불이 붙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달라진 건 소매가 붙들려 당겨지는 느낌을 알아차린 직후였다.
그때 나루토는 고개를 내렸다. 옷자락을 잡은 작은 손의 주인을 보았다. 차갑게 적신 천을 남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붙들고, 반대 손은 같은 것으로 얼굴 절반을 틀어막고 있었다.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검었다.
그가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천이 닿은 손이 살짝 축축해졌다. 나루토는 그 즉시 천을 받아 다른 손으로 아이를 꼭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5년이었다. 그가 죽고 5년 동안, 세상은 그렇게 망가졌다. 나루토는 물밀려 들어오는, 절대 자신의 것일 수 없는 기억을 죽 곱씹었다. 싸움이 이어졌고, 형제와 가족은 거리낌 없이 서로를 향해 칼을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래선 안 되는데⋯.
건물이 끝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들을 앞서던 한 닌자가 결국 희생되었다. 나루토와 사라다는 뒤로 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에도 끝내 불길이 일고 말았다.
차크라를 써야 해.
나루토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 긴박한 순간에 한참을 기다려도 어떠한 느낌조차 오지 않았다. 나루토는 당황했다. 의문은 사라다가 조용히 한 말을 꺼내고서야 해소되었다.
몸이 차가우세요.
그 뜻을 이해하고, 정신이 멍해졌다. 나루토는 자신의 되살아난 심장이 이제 되어서야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한 술법의 장난인가, 그는 바로 지금까지 죽은 몸이었던 셈이다.
그 직후, 나루토는 숨이 끊어진 닌자들에게로 다급히 뛰어갔다. 그들의 이마에 묶인 서클렛을 풀어내 사라다에게 단단히 동여매 주고, 자신 역시 똑같이 했다.
그는 이것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유일한 일이었다. 사라다는 눈물이 고여 흘러내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루토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 그는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식을 잃었다. 친구를 잃었고, 모든 가족을 잃었다. 그들 모두를 잃었다. 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비통, 울분, 친애⋯. 그 모든 것이 고통 속에서 죽은 몸의 심장을 다시 끌어올렸다.
그는 살 것이다.
머리 위로 뜨겁고 무거운 것이 가까워졌다. 그는 그대로 아이를 잡아 몸통 아래로 꽉 끌어안으며 엎드렸다. 불타오르는 기둥이 그들을 덮쳤다.
나루토는 하나하나 모두 느꼈다. 그의 몸은 그렇게 불에 구워졌다.
전신이 녹아내리고, 기둥이 짓누르는 등은 뭉개져 검고 딱딱하게 변했다. 머리카락에 불이 옮겨붙어 싸그리 타 버렸고, 왼쪽 눈꺼풀이 흘러내려 눈을 덮으며 얼굴의 형태도 완전히 흩어졌다. 어느샌가 천을 놓쳐 버린 탓에 폐 안은 재로 가득해졌다.
꿈속이나, 나루토는 그 긴 시간을 다시금 지났다. 이제 버티고 버티다 보면 인기척이 들린다. 머리카락이 하얀 닌자가 크게 소리쳐 알리고, 뒤이어 온 이들의 발걸음은 급해진다. 그리고, 그리운 곳에 들어가면 그는 드디어 안심한다.
눈앞이 다시 가물가물해졌다. 사방은 그를 다시 익숙한 어둠 속으로 데려가려 했다.
‘돌아갈 때가 올 거야. 그때가 되면⋯,’
암막이 조금씩 나루토를 덮었다. 나루토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깜깜해졌다.
‘나는 살겠어.’
‘그리고 그 아이를 다시 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