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Till death do us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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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Till death do us part
Summary
상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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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혈관을 비집고 들어오는 뻐근한 감각 이후 쇼는 즉시 사지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꺾었다. 

"이 약물이 귀관에게 미치는 영향이 뭐지?”

또 이 꿈. 바싹 마른 입을 축인 다음 늘어지는 눈꺼풀을 밀어올린 쇼는 천천히 대답했다. 정신적 활동 능력을 저해하여 심리적 무장을 해제시킵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머리가 크게 끄덕였다. 

"저항할 수 없는 작용인가?"

"아닙니다."

"귀관이 적에게 피랍되어 지금과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도 저항할 수 있나?"

"그렇습니다."

술술 답을 내놓으면서도 쇼는 조금 지루했었다. 좁고 퀴퀴한 방에 갇혀 무의미한 진술과 신문을 주고받는 의미는 이해했지만 그저 장난 같았다. 언제쯤 이 짓을 끝낼 수 있을까. 눈을 깜빡이며 긴장감을 다잡고 두서없는 말로 참 거짓을 뒤섞는다. 자백제를 얼마나 맞든, 시간을 얼마나 쓰든, 주사기 든 신문자와 피랍자는 영원히 교착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대테러 집단의 일원이 되려면 다른 선택지는 고려사항에 있지도 않아야 했다.

쇼는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사민 쇼의 무사 통과를 예상하고 있었음은 모른 척 하기도 새삼스러웠다. 물론 이변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을 들어 짙게 그림자 진 교관의 얼굴을 향했을때 쇼는 마지막 관문을 지나 정식으로 요원 번호를 부여받았다. 넓게 늘어난 동공이 꿈틀대며 조여들었다. 축하한다, I6A.

쇼는 마음 속으로 훈련병 시절 숱하게 외웠던 슬로건을 중얼거렸다. 나의 무기는 강인한 의지. 내민 손들이 바투 맞잡혔다. 꿈은 늘 거기서 끝이 났다. 

 

구역질과 함께 쇼는 의식을 되찾았다. 두통과 근육통이 심했다. 신생 마약 갱단 치고는 썩 괜찮았지만 아직 고통과 죽음 사이를 가르는 스위치를 발견하지는 못 한게 분명했다. 사람을 기절시키고도 남을 전류를 고스란히 얻어맞아 한동안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쇼는 눈을 꿈뻑거리며 맞은편에 보이는 커다랗고 흐릿한 물체를 응시했다. 아직 시야가 또렷하지 않았다. 

 

“한때 군인이었어, 나는. 

 

쇼는 팔뚝을 꽉 쥐는 악력을 느끼며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이 땅에 팔자 망친 전직 군인이 한 두명인줄 아나. 팔을 부러뜨릴 것 처럼 억세게 쥔 남자는 분명 불명예 제대를 거쳐 인생을 망가뜨린 흔해빠진 사연을 가졌을 것이다. 늘상 화가나 있고, 자신을 통제하지도 못하면서. 쇼는 그런 사람을 많이 봤다. 사실, 한때 동료로 둔 적도 있었다. 

 

“보스는 널 적당히 두들겨서 정보를 빼내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진 않거든. 섬세하지 못하잖아. 게다가 네가 순순히 불 것 같지도 않고. 넌 군사 훈련을 받았어. 보면 알아.”

 

남자는 상박에 남은 옅은 화상 자국을 꾹 눌렀다. 쇼가 뒷목을 뻣뻣하게 굳히며 숨을 집어삼키자 만족스러운 듯 손을 치웠다. 시야 가장자리에 남자의 '섬세한' 신문도구가 얼핏 보였다.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쇼는 곧 닥쳐올 근무력증과 의식이 아득해지는 감각을 떠올리며 시간을 거꾸로 세어보았다. 대략 7년 전. 주사제가 들어오는 뻐근함과 느낌과 동시에 생각을 마무리지으며 쇼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온 몸이 늘어지다 못 해 곧 심장까지 멎을 것 같았다. 

그에게 사실을 조금이라도 말해주면 어떨까. 이 신문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적당히 중요하지 않은 사실 몇 개정도 털어놓으면 수갑 한 쪽 정도 풀어낼 시간을 벌 수 있을텐데. 뒷머리채를 잡혀 올라온 눈 앞에 드디어 남자의 얼굴이 환하게 들어왔다. 콧등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군인이었다고? 어디서 복무했는데?”

“......”

“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난 4년 전에 제대했어. 거기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지. 그러다 뭐… 비밀스런 일에 끼어들게 됐고. 난 항상 그런 유혹에 약했거든.”

“무슨 일을 했지?”

“사람을 죽였어.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

“그걸 판단한 건 누구였고?”

 

쇼는 말없이 웃었다. 

 

“알고싶지 않을 걸. 쓰레기같은 인생이라도 계속 살고 싶을 것 아냐.”

 

짤까닥, 쇼는 재빨리 손을 털어내며 곧바로 주먹을 내갈겼다. 



*



쇼는 몇 번씩 걸음을 멈췄다. 역시 살려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내버려두면 머지 않아 제 발로 죽을 자리에 걸어 들어가겠지만 굳이 후환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멈춰선 쇼의 귀에 작은 소음이 끓었다. 그래, 계속 움직여야 한다. 다시는 마약상이랑 얽히고 싶지 않아. 대답은 없었다. 



*




맥주 병을 들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실온에 둔 맥주에서는 역겨운 맛이 났다. 병을 뒤집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버린 쇼를 향한 카메라는 마치 노려보는 시선처럼 깜빡깜빡 빨갛게 점멸했다. 긴 침묵은 렌즈를 통해 저를 보고있는 존재의 분노를 암시했지만 쇼는 여전히 무심히 형체없는 시선을 받기만 했다. 저 너머의 존재가 점점 더 정교하고 정확하게 인간을 흉내 낼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이 침묵은 그저 경고에 불과하다. 현재 유일하게 확보중인 자산이 생존확률을 자꾸만 줄이고 있는데 대한 대비책을 계산했을테고, 저 단정하고 염려스러운 음성은 사민 쇼를 설득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쇼를 못살게 굴던 골칫거리를 99.8% 재현한 기만이다. 

 

몇 분을 더 기다려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루종일 귀에 쑤셔넣어뒀던 이어피스를 빼고 마침내 잠을 좀 잘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온 세상을 감시하는 인공지능이 지시하는대로 이유도 모른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건 몹시 지치는 일이다. 루트는 어떻게 이런걸 그리도 좋아할 수 있었는지. 루트는...

쇼는 기계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거의 언제나 불쾌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어 한사코 피했다는 게 맞다. 쇼는 생각에 얻어맞아 도망치듯이 카메라 앞에서 벗어났다. 

쇼는 화가났다. 이름 모르고 복잡한 감정이 치밀 때 마다 그저 분노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났고 그렇다고 한들 분노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화가났다. 찬 공기를 맞으며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고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는지 정도만 알고 싶었다. 얼마를 이렇게 보내야 대비하지 못 했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만. 쇼가 시야에서 사라진 시간이 너무 길었다고 판단했는지 기계는 TV 볼륨을 최대로 올려 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아마 해롤드는 알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좋은 상담사를 추천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고 나아질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 하니까. 옆집에서 소음에 대해 항의하러 오기 전에 TV를 끄러 들어가며 어두운 노트북 화면을 쏘아보았다. 따뜻하게 덥혀진 공기가 언 피부 위에서 따끔거렸다. 의도적으로 그 배려를 모른척 한 쇼는 중얼거리며 카메라 앞을 지나쳤다. 아침에 또 전화 걸어서 깨우면 네 케이블을 전부 뽑아버릴거야. 전기충격기를 맞고 마취제가 대중없이 투여된들 쇼는 어김없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쇼는 잘 먹고, 잠도 잤지만, 편안한 잠자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마자 쇼는 30층짜리 건물 꼭대기에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해롤드는 새로운 신분에 금세 익숙해진 것 같았다. 쏜힐을 적법하게 인수할 만 한 사람은 그가 아니면 따로 있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새로운 사업주의 얼굴조차 보지 못 했지만 사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걸 쇼는 알았다. 신문 기사나 웹 페이지에 걸리는 ‘해롤드 렌’이 그라는 것만 알면 된다. 하지만 전혀 상관 없는 누군가 다가와 내가 당신의 고용주인데, 지금 당장 서버를 봐야겠소, 해도 매일 바뀌는 격리 해제 프로토콜 없이는 어림도 없다는걸 확신하게 됐을때에도 쇼는 그를 24시간 감시하는걸 그만두지 않았다. 기계의 비호 아래 몇 번이나 그런 종류의 안전망을 뚫어냈었다. 다른 누가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들은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시계 대신 전화기부터 확인한다. 일상적인 업무보고처럼 날아오는 잠재적인 위협과 임박한 상황발생에 대한 예측은 늘 비슷한 수준으로 안정적이었지만 결코 발을 뻗을 수는 없었다. 주가 조작으로 구설수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방탄조끼는 좀 과한 것 같은데요, 해롤드는 불편한 내색을 하긴 했어도 쇼의 의견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다. 불안은 쉽게 전염된다. 그 의심 덕에 새로운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별로 불만할 거리도 아니었다. 개인 경호원? 비서는 따로 구하겠지? 물론 빈정거리긴 했지만 보는 눈들 앞에서 실력행사를 하더라도 적당히 용인될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앞으로 몇 시간은 기계가 말을 하지 않을겁니다. 순차적으로 모든 서버를 재기동해서 업데이트 할 예정이니 그 동안은 최대한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굳이 업데이트가 아니어도 당신 기계가 그렇게 수다쟁이는 아니던데요?”

 

온화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쇼는 과자 접시를 마저 해치웠다. 

 

해롤드는 기계의 상태에 대해 가끔 걱정했다. 남아있는 누구도 인공지능의 애도가 길어지는걸 어떻게 하거나 그로인해 어떤 행동양식을 보이게 될 지 예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실제로 기계는 스스로 목소리를 고른 이후 전보다도 훨씬 말이 없어졌다. 쇼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창조주는 눈썹을 들어 올리곤 비밀이라도 속삭이듯 목소리를 죽였다. 기계는 말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위험을 분석하고 그걸 알릴 의무가 있으니까요. 쇼의 표정 없는 얼굴을 마주 둔 그는 말을 쏟아냈다. 

 

“그 말인즉, 임무를 태만히 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쇼 씨,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의 일종입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손 놓고 보고있을 수 밖에 없겠네요. 당신은 이제 아무런 구속력도 없으니까.”

“하지만 기본적인 제약은 아직 존재해요. 적어도 누굴 해칠 계획은 세우지 않겠죠.”

 

-직접적으로는. 쇼는 아마도 해롤드가 하려고 했지만 경직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 혀뿌리 뒤로 넘겼을 말을 중얼거렸다. 곧바로 테이블에 침묵이 주저앉았지만 쇼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제 의사는 안 변했습니다.”

“바지사장에 좋은 남편 노릇이나 제대로 해요.”

“...그레이스는…”

“당신은 소시오패스가 아니잖아요.”

 

해롤드는 결국 반박하지 못했다. 상실의 느낌이 어떤지, 그대로 사는 것은 또 어떤지 지난 수년간 겪어보지 않았던가.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해롤드는 나지막이 패배를 인정하며 털어놓을 뿐 더이상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가 죽지 않는 것 외에 쇼에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찾아가야 할 무덤이 이 이상 늘어나는건 원하지 않는다. 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으로 남겨둔 샌드위치를 집어삼켰다. 해롤드는 그의 식사를 방해하지 않으려 최대한 차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불편한 다리에 체중을 더느라 조금 주춤거리며 물건을 챙겨 사무실을 떠나기 전, 그는 쇼의 머리꼭지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 일 없는거죠, 사민?’

“무슨 일이 생기면 싫어도 나보다 먼저 알게될 텐데요.”

“그걸 묻는게 아닙니다.”

 

요즘도 그로브즈 씨에게 찾아가나요? 

쇼의 부지런한 턱이 악다물렸다. 

 

“난 리스의 무덤도 찾아가요.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대접은 할 줄 아니까.”

 

부러진 뼈를 덥석 잡힌 것 처럼 쇼는 으르렁댔다. 방어적인 위협에 잠깐 멈칫하며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떨던 그는 쇼를 묘한 얼굴로 응시했다. 고칠 수 없는 아픔과 약간의 분노 사이에 심긴 안타까움 한줌. 쇼는 심한 모욕감이라도 느꼈다는 듯 그를 노려보던 눈을 저쪽으로 치워버렸다. 목구멍과 눈시울이 타는 것 같았다. 그렇죠. 물론입니다. 시선을 내린 채 해롤드는 떠났다. 짝이 안 맞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따라 걷는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을 때 까지 고개를 고정하고 쇼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받지 않는 전화를 포기한 다음 직접 귀에 대고 말을 걸어오도록. 

 

*

 

하루는 그저 단편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다. 잠들기 전 떠올려 보면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래서 쇼는 종종 거리를 마음대로 쏘다니곤 했다. 밤이든 낮이든 시간이 나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다. 그동안 카메라 밑을 수도 없이 지나쳤지만 쇼를 불러세우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자산 위치: 확인됨’

‘마지막 접근 이력: 13시간 전……’

‘통신 시도중……’



*

 

쇼는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창가에서 비켜났다. 대신 소파에 웅크려 잠들어있는 조력자를 투박하게 두드려 깨운 다음 창틀에 기대 놓은 저격소총을 손으로 가리켰다. 말 해. 쇼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쩍 하품을 하는 남자의 눈을 피해 숨으며 속삭였다. 귓바퀴를 쓸듯이 이어피스를 눌러 전화를 받자마자 지시가 쏟아져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불편해 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쓸데없는 말을 끊임없이 지껄이는 사람들의 입을 닥치게 만든 뒤 찾아오는 평화에 가까웠다. 모멸감에 눌려 밖으로 나오는 깊은 숨소리는 듣기 좋기도 했다. 그러나 기계는 숨을 쉬지 않는다. 당연히. 그것의 침묵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해서 귀 뒤쪽을 탁탁 두드려 압력을 빼내고픈 충동을 일으켰다. 흉내 낼 수 없는 나머지 0.2%의 공백이 이런 식으로 덮쳐올 때 마다 쇼는...

 

‘그나마 당신을 덜 자극할 만 한 말을 생각중이었어요.’

“실패했네. 용건만 말해.”

‘없어요, 쇼. 임박한 위험도 없고 번호도 아직은 무사해요. 커피라도 한 잔 하는 건 어때요?’

“…커피.”

‘그 김에 잠깐 앉아서 쉬는 게 좋겠어요.’

 

쇼는 푹 꺼진 소파를 내려다봤다. 권유를 무시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뜨고 있던 눈알이 빡빡했다. 화장실 거울로 들여다 봤던 얼굴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도 않았기에 쇼는 군말없이 커피머신의 전원을 켜 머그 한 잔을 가득 채웠다. 푹 기대 앉은 소파에서는 오래된 직물에서 나는 쿰쿰한 곰팡내가 났다. 

맛 없는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넘긴 쇼가 식도를 태우며 내려가는 감각에 만족으로 신음했다. 눈이 감기길 기다리던 목소리가 재차 말했다. 쇼에게 무슨 말을 하려면 언제 해야하는지 이미 체득해 노련하다 못해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잠을 좀 자도 좋아요.’

“절대 안 될 말이지. 특히 저런 덜떨어진 인간이랑 같은 방에 있는 동안엔. 왜 전화했어?”

‘그냥 이야기나 할까 싶었어요. 물론 당신은 수다스럽지 않고 나를 그다지 안 좋아하는 것도 알지만.’

 

쇼는 24시간 전 해롤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쇼는 기계가 어디까지 알고있는지 궁금했다. 귀 속에 잠들어있는 기계의 인지력이 정말로 잠을 자고 있었을까? 대부분 기계는 쇼의 사생활을 보장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은 경우가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났던 사람의 역할과 대화의 내용 때문에 곤두서려는 신경을 느끼며 쇼는 금방 식어버린 커피를 조금 더 마셨다. 스코프를 들여다 보고 있는 남자의 짧게 깎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하고 목소리를 더 작게 줄여 속삭였다. 생각했던 것 보다 덜 느껴지는 적개심이 내심 아쉬웠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당신에게 말하는 게 아니니 신경 끄라고 이야기하는 건 매번 성가셨다. 

 

“알면서 묻는 건 나쁜 버릇인데. 사람을 떠보면 안 되지.”

'난 당신들의 생활을 존중하는걸요.'

“난 네 정보를 믿지 널 믿지는 않아. 해롤드도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유를 알고 싶어요.'

"네가 수상하게 굴고 있으니까."

 

기계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을 다시 시작하기 전 짧은 고요 속에서 쇼는 체념을 느낄 수 있었다. 해롤드야 항상 그랬으니까. 기계의 아버지는 자식을 두려워했고 그것을 빚어낸 걸 후회했으며 스스로의 나약함을 원망했다.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걸 모두 지켜보고 난 뒤에야 자유를 허락했으니 불신의 관성이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고, 기계는 차분하게 이해한다고 했다. 내 존재에 앞선 대전제는… 나는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해요. 거기에 거짓말은 용인되지 않고요. 쇼는 반사적으로 입매를 당겨 올렸다. 진실을 고하지 않는 건? 주요 자산들이 위험에 처하리라 예상될 때 알리지 않은 경고가 벌써 몇 개나 있었나, 쇼는 해롤드의 무정함을 탓하지 않았다. 쇼 역시 감히 루트를 화장할 용기가 없었다는 말만은 믿지 않았다. 기계에겐 언제나 목적이 있었고 그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 정도는 감내할 능력도 있었다. 항상 완벽하게 게임에서 이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트의 귀 한쪽이 멀도록 내버려 둔 것 처럼. 그것을 기꺼워 했는지 아닌지는 쇼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와 이야기 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수다스런 기계는 미심쩍기도 했고 대화가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쇼는 나빠, 하고 대답했다. 

 

‘그럼 나는 어떨 것 같나요?’

“나쁘겠지. 우리 둘 다 대체 불가능한 걸 잃고 어거지로 서로를 붙들고 있는 거니까.”

‘…나는 선택권이 없었을 때를 제외하고 항상 루트를 통해 이야기했죠.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어요.’

 

기계는 작게 속삭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신이 선지자를 고르는 기준을 인간이 알 도리가 없다. 의도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기계에게 슬슬 짜증이 날 무렵 그것은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그랬어야 했다고. 언젠가 그녀가 떠날 날이 올 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 날을 대비해 서로를 보듬어 안기 위해서, 자신이 쇼를 마지못해 잡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게끔.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이 표류가 언제쯤 끝이 날 지 기계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단, 유일한 이해자, 혹은 나머지 반을 잃은 저희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루트도 항상 이상한 타이밍에 이상한 소릴 했지. 그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제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 건지도 몰라요. 그녀가 내 안에 영원히 기억됨을 위안삼고-’

“말 돌리지 말고 본론을 얘기해.”

 

쇼는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기계는 준비했던 말을 꺼내놓기 까지, 이만큼 멀리 돌아왔으면서도 잠깐의 준비를 거쳐야 했다. 쇼, 누군가 루트를 찾아갔어요. 그녀를 데려간 것 같아요.

쇼는 충격을 버텨내듯 몸을 웅크렸다. 웅크려 앉은 덕에 목소리가 쥐어짜이듯 고통스레 밀려나왔다. 그걸 이제 말하는 이유가 있어? 

 

‘재부팅을 끝낸 다음 계산해 봤어요. 290만 번. 당신이 보인 반응은 매번 똑같았어요,사민. 지금 가 봐야 아무것도 없으니까…’

 

기계는 간곡히, 거의 울먹이듯이, 당신이 혹시라도 살아있을지 모르는 그녀를 찾아 무의미한 가능성으로 뛰어드는 걸 그냥 둘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스 두는 법을 배웠어요. 4시간만에 수십명이 넘는 명인을 이길 만 한 수준이 됐죠. 나는 튜링 테스트에서도 문제 없이, 몇 번이고 인간을 이길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떤 테스트건, 게임이건, 내 승리는 결국 당신들의 승리이기도 해요. 루트는 내게 치킨 게임을 하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그 때 절실히 느꼈어요. 인간이 걸린 일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그 확률이 나에게는 무의미했어요. 그런 승리를 얻어내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일 때가 있더군요. 나는 이제 내 소중한 것을 걸고는 어떤 협상이나 게임도 하지 않을겁니다. 

 

그 비쩍 마르고 약간 정신나가있던 여자. 아무것도 안중에 없다는 듯 자꾸만 목숨을 내걸었던 여자.그 눈물겨운 숭배 끝에 결국 인공지능의 사랑을 받아내 전기적 신호의 형태로 영원히 기억될 아날로그 인터페이스. 만일 기계가 사랑을 안다면, 만일 그것이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을 보낸 끝에 얻어내는 보상이라면 쇼는 루트를 사랑했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쇼에게는 목소리와 말투를 그정도로 정확하게 모사해낼 능력이 없었고 한 순간을 바래지 않는 기억으로 남길 수도 없었다. 기계는 모든 면에서,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부분에서조차 쇼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그러니 존경과 사랑을 받아 마땅했으리라. 

 

루트는 쇼가 기꺼이 따를 단 한명이었다. 쇼는 오로지 그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었다. 날 위해 와줄줄 알았다는 말에 한치의 의심도 없어지기까지 루트는 자기 안에서 쇼의 형상을 깎았을 것이다. 그가 옳았다. 화살의 모양을 하고 직선으로 날아온 쇼를 마음에 꽂은 채 루트는 땅 속에 묻혔다. 쇼가 부러지거나 다시는 일어서지 못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날아가 꽂힐 과녁을 잃어 영원히 떠돌 일만 남았을 뿐이다. 

 

쇼는 그 음성의 억양은, 거기에 밴 소금기와 절망은 단지 반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메아리. 목적 없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한 청각 자극.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게 구현된 목소리의 주인이 망자로서 쉬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 불필요한 상상을 하게 된 쇼의 인내심은 빠르게 말라붙었다. 제발, 하고 쏟아내는 말투에 이유도 모른채 내내 눌러놨던 분노가 떠밀리듯 터져나왔다. 순식간에 무기와 차 열쇠를 챙겨 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 쇼는 되는대로 내뱉었다. 쳐다보고 지껄이는 것 말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쇼가 돌아온 건 일주일 하고도 8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가 남긴 폭력의 자취를 좇으며 기계는 고통에 겨워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차갑게 내쳐졌고, “찾아.” 하는 말만 남긴 채 침대 위로 쓰러지는 쇼에게 불평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쇼는 알면서도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어버린 관뚜껑 안쪽의 공백을. 낡은 삽자루를 쥐고 무덤을 파헤치는 불경을 저지르면서도 알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기계가 몇날이고 며칠이고 루트의 흔적을 찾아 헤멨을 줄도 알면서 반경 수 킬로미터를 뒤져가며 손에 넣은 영상기록을 가져오기 전에도 의심했을 것이다. 기계는 쇼를 달래기 위해 절대로 하지 않는 실수를 했다고 말해야 했다. 기계는 반드시 뭔가를 놓쳤어야 했다. 수북하게 쌓인 기록매체를 조용히 읽어들이며 이미 수십만 번 들여다 보고 분석한 카메라 피드를 되감는 동안 잠들어 있는 쇼의 깊고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실낱같은 안도감과 의도된 구속감에 묶이는 순간 기계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자가평가를 잠시 묻어두었다. 진실을 숨긴것도, 다시 고하기로 한 것도 결코 쇼를 조종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부탁하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애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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