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Till death do us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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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Till death do us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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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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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글쎄,사민. 죽음은 상태의 전환일 뿐이야. 

루트는 그렇게 말하곤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형태 말이야. 정해지지 않은. 현실 세계는 기본적으로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이지. 

 

루트는 정말로 쇼를 속속들이 알았다. 쇼는 그다지 위로와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에서도 의미를 찾지 않는 쇼에게 꼭 필요할 때가 오리라 생각하며 줄곧 기다려 왔을까. 생존의 선상에 1을 그리며 나아가야 하는 순간의 쇼를 위해.

 

사는 것과 죽는 것은 그저 상태일 뿐이다. 이진수처럼. 글쎄. 그렇게 단순한 거면 얼마나 좋겠어. 

 

 

 

*

 

 

사민 쇼는 거의 떼를 쓰고 있었다. 적어도 기계에게는 다른 점이 없었다. 인간들은 종종 제 목숨을 무기처럼 휘둘렀다. 그들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게 마치 커다란 재앙이라도 된다는 듯이. 많은 경우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이 기계로 하여금 쉬이 입을 열지 못 하게 만들었다. 종종 반쪽짜리 삶이 인간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는 것도 보았다. 어떤 인간에게는 살아야할 이유가 필요한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기계에게는 배움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아버지도 있으니까. 비록 그가 자길 그렇게 부르도록 허락하지는 않았겠지만. 

마치 처음인 양 십수번 세상의 빛 아래 드러났을 때, 기계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왜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지 몰랐다. 인간이 저를 빚은 이유는 선택하는 책임의 무게를 대신 져 줄 뭔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해롤드 핀치가 자신에게 ‘빛이 있으라’고 했던 순간부터. 사람들은 불합리했다.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하곤 했다. 무작위적인 정보들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게 내 역할이 아닌가요? 오랜 생각 끝에 내민 질문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인간은 그냥 정보의 집합이 아니란다. 

 

물론 난 물리적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그녀를 남의 손에 맡겨야 했어요. 그렇다고 지켜보지 않았다는 건 아녜요. 그녀가 드나들었던, 거쳐갔던 모든 장소와 사람들을 빠짐없이 확인했어요, 쇼.

“사람들 발 밑에서, 뉴욕 지하철 밑바닥에서 죽은 사람이 초인공지능이랑 얘기를 하고있는데 어디서 재림예수라도 나올 지 누가 알아?”

 

죽음에서 돌아오는 방법은 없어요. 

기계는 말을 아꼈다. 쇼는 화가 나 있었고, 진척 없는 조사 때문에 초조해 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다리에 힘을 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바라건대 전선 다발과 전자기성 물질 어딘가에 마음이란 게 있어서, 그 안에 루트를 소중히 묻어두고 남은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었으면 했다. 육신만 남아있다 감쪽같이 사라진 루트가 생존해 있을 확률에 이끌린 쇼에게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그렇게 되기만을 바랐다. 쇼가 정말로 망자의 부활을 믿는 건 아닐터다. 애초에 그 멍청이가 살아서 우리 눈을 피해 어디로 가 버렸던 걸수도 있지. 지금 와서 이러는 이유는 나중에 알아내도 돼. 기계는 다음에 나올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답이 필요해요, 해롤드. 난 그 대답이 필요해요. 사민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넌 알고 있지? 루…… 걔가 정말 죽은거야? 그 무덤에 찾아간 게 누군지 알잖아.”

“몰라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야기 했듯이, 나는 그 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 쇼는 싸늘했다. 

마침내 인간이나 그들의 어리석은 결정들을 이해하게 됐을 무렵엔 그 돼먹지 못한 협박에 너무나도 쉽게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기계는 인간 요원들을 깊이 사랑했다. 그건 해롤드 핀치가 세운 원칙이나 의도된 규제 바깥의 영역이었다.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날 존재하게 된 신은 다른 모양을 한 모조품밖에 되지 못했다. 루트가 세상 어딘가에서 이 말을 듣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눈을 그렁거리며 쏘아붙일 터지만. 

 

 

 

*

 

 

 

루트는 약하고 지쳐있을 때에야 비로소 온전히 쇼에게로 왔다. 짐승이 제 굴 속에서 상처를 핥듯 겨우 걸음이나 스스로 걸을 정도로 회복될 때 까지 두문불출 하기에 손을 몇 번 빌려줬더니, 으레 그래도 되는 줄 알았는지. 몸에 구멍을 내놓고 웃을 수 있는건 저 뿐일 줄 알았던 쇼는 내심 감탄했다. 역시 넌 제정신이 아니야. 

쇼는 그에게 네 영혼의 반쪽이 지켜주지 않느냐고 했다. 한껏 비꼴 의도였지만 루트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나머지 반이 여기 있잖아. 

문득 묻고 싶은 게 생겼지만 쇼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온전한 너는 어디에 있는데? 쇼는 질문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특히 전직 청부업자와 함께 있을때는 더. 믿지도 않는 영혼의 행방을 두고 말씨름하느니 잠을 더 자거나 태세를 정비하는 편이 나았다. 쇼는 불문율에 익숙했다. 생활에 필요한 급료를 주는 기관이 그랬고 개인적인 고용주와 떳떳하지 못 한 행동들이 그러했다. 쇼는 루트를 잘 몰랐지만 루트는 쇼를, 쇼 스스로도 잊어버리고 있을 사사로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묻고 답하지 않는 게 둘 사이의 규칙이었다. 

 

가끔 말 없이 제 얼굴을 매만지는 손을 내버려두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가 간과했던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은 도를 넘게 솔직해지곤 한다는 점이었다. 허튼 말 속에 의미를 심고 그것을 알아듣길 바라는 행위에 쇼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어지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영혼을 반으로 쪼개 무생물과 공감 무능력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해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전쟁을 대비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난 이후를 생각해 볼 시간이 있을 리는 더욱 만무했다. 가늠할 수 없는 내일을 기대하며 버티는 대신 순간을 살았고 루트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했다. 금방 떠났다가 곧 되돌아와 다시 떠나기 전까지, 루트는 멋대로 쇼의 집에 머물렀다. 시선 앞에 유유히 놓여 내가 죽으면 내 무덤 앞에 와 울어주겠느냐,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여실히 느껴졌다. 삶을 마칠 준비 끝에는 다시 쇼의 곁을 맴도는 것 밖에 없었으리라는 게. 

 

쇼는 해롤드의 판단력이 흐려질 때 마다 그가 이성을 찾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리스가 냉정을 잃고 루트가 두려워할 때 마다 자신만은 감정적인 판단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어느 때에 구조를 요청할 곳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죽겠지만, 그 때엔 그들 모두가 운명을 함께하고 있을터다. 그 세사람과 함께. 기꺼이 친구라고 부를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따금 회로가 꼬인 로봇처럼 행동했던 이유가 누구도 혼자 남겨두지 않고 싶었던 발버둥이었음을 깨달았을땐 고마웠다고 말 할 사람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루트의 무덤 같은 가정은 쇼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내내 손이 떠나지 않아 뺨이며 이마가 저리게 느껴질 때 까지 기다리다 루트를 집에서 내쫓았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면. 쇼는 항상 마지막으로 루트에게 입술을 들이박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 허튼 장단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농담이 재미있어야 농담이지. 입 좀 닥쳐. 내 집에서 나가. 

 

 

*

 

쇼는 전에 없이 자주 꿈을 꿨다. 이 약물이 귀관에게 미치는 영향이 뭐지? 지루해져서 그는 대답했다. 저항할 수 없는 작용이 아니며 언제든 지금과 같이 견딜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나라의 안녕과 기밀을 맞바꿀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건조한 입 안에서 혀는 남의 것 처럼 굴러다녔다. 

행선지 없는 여정이 길어질 수록 쇼는 지쳤다. 꿈과 현실의 다른 점은 연속성이란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규칙을 가지고 연속되는 허상이라면 현실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쇼는 생각했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자백제와 질문은 진짜였다. 언젠가 쇼는 어두컴컴한 모의 신문실에 묶여 앉아 자백제를 맞았다. 답이 정해진 질문에 대답하는게 지루했고 있지도 않은 인간성을 시험하려는 시도를 비웃었다. 귀관의 가족,친구,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게 되어도 저항할 수 있나? 쇼는 그 마지막 시험만은 참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가족과 친구를 소중한 것과 동치관계에 놓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쇼에게 소중한 것은...... 적어도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새파란 신병의 비웃음을 샀던 마지막 질문을 줄곧 떠올리지 못한 건 그러기엔 무가치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쇼는 눅눅한 이불을 걷어 차내며 씩씩거렸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머리맡의 약 통을 비틀어 열었다가 곧 창 밖으로 내던졌다. 적어도 예고라도 하고 온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겠지만 쇼는 아무것도 알 길이 없었다. 식은땀이 체온을 떨어뜨리고 반라인 살갗이 파르르 떨렸다. 끈적이는 이부자리나 소름이 오르는 뒷덜미보다 불쾌한 건 오래도록 묻어뒀던 마지막 질문에 자신있게 그렇노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지금이었다. 목구멍 안으로 무엇이 끓고 온 얼굴이 화끈거렸다. 날이 밝을 때 까지 기다린 쇼는 머문 흔적을 소리없이 정리하고 검은 모자 챙을 깊게 눌러 당긴 다음 객실을 나섰다. 

 

 

*

 

 

루트는 가끔 간병인 처럼 굴기도 했다.

 

“얼른,샘.”

“으.”

“나도 총 맞아봐서 알아. 그렇다고 네가 문명을 포기하는 걸 그냥 둘 수는 없어”

“양치 하루 안 한다고 지긋지긋한 문명이 무너지진 않아.”

“하지만 네 남은 인생을 만성적인 치통과 치주질환에 시달리며 살겠지.”

“내 남은 인생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걸.”

 

쇼는 칫솔을 든 채 말없이 눈썹을 들어올리고 있는 루트를 모른 체 하며 몰래 입술을 말았다. 몇 년 뿐이라도 고통스럽게 사는 것 보단 훨씬 나을거야. 쇼는 명랑한 목소리 뒤에 숨긴 상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럴때 마다 별 내색 않고 루트의 말을 들어주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쇼가 아는 루트는 아끼는 방법이라곤 그 뿐이었다. 표정을 한 번 찡그린 쇼는 루트에게서 칫솔을 낚아챘다. 다 보고있어, 하듯 팔짱을 끼우고 가만히 지켜보는 눈을 끝까지 마주치면서.

 

“하다하다 너한테 건강관리까지 받다니.”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자는 사람한테 테이저나 꽂고, 아무렇게나 마취를 시켰다는거지? 덕분에 연금 받을 때 까지 살겠네.”

“그게 내 소원 중 하나야, 자기야.”

 

쇼는 거품을 탁 뱉으며 덧붙였다. 잊었나본데, 난 죽은 사람이고 가족도 없어서 연금 안 나와. 욕실까지 따라 들어온 루트는 변기 위에 앉아 무릎에 팔을 고이고 있었다. 손바닥에 받친 얼굴이 퍽 부드럽게 늘어졌다. 내가 받게 해 줄 수 있는데. 아마 대꾸 없이 고개를 터는 쇼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풀린 머리를 대충 묶어올린 쇼의 단단한 등을 온 마음을 다해 바라보던 루트가 속삭였다. 같이 늙을 수 있으면 좋을거야. 그 때는 어떻게 했더라. 젖은 얼굴을 닦다 말고 막대처럼 서 있기만 했었나. 습관처럼 흘려들으려던 그 말이 어떻게 들리는 지를 새삼스레 깨달아서.

 

“설마 그거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네가 생각한 그런 게 뭔데?”

“...말 안 할래.”

“왜, 무슨 생각을 했길래? “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결국 저런걸 적당히 참아주는 게 익숙해 진 것 처럼. 

쇼는 루트의 그 표정을 기억했다. 음흉한 웃음이 진 얼굴. 선물이라도 줄 것 처럼 의뭉스럽게 빛나는 두 눈. 할머니가 된 루트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거울 속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정말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쇼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어느날 점심을 사 왔다고 말하듯이 네 연금 계좌야, 하며 나타날 희끗한 머리의 루트를 보는 것. 우린 법적으로 아무 사이도 아니고, 너랑 안 나눌거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쏘아붙이는 것.

 

픽 나오는 웃음에 놀라 쇼는 눈썹 사이를 꾹 눌렀다. 기계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느꼈던 반항기 청소년이 된 기분을 곱씹지 않으려 쇼는 눈에 힘을 주고 속으로 수를 세고 있었다. 순서대로, 거꾸로, 앞 뒤로 곱하거나 나누며 센 수가 벌써 아득해졌다. 오가는 사람들이나, 차 위로 뭔가 -아마도 내리다 멎었다를 반복하던 눈-가 떨어지는 소리 속에 천천히 의식이 멍해진 틈에 파고든 옛날 일로 실없이 웃었다는 걸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여전히 뺨이 희미하게 당겨지는 감각을 지우려 쇼는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오래된 주유소 주차장 그늘 밑에 차를 세워놓고 의미없는 숫자 세기를 시작한 애당초의 이유로 돌아왔다. 주유소 기둥마다 달린 카메라의 사각에 조용히 웅크리고 한참을 시간이나 죽이던 이유. 

이제와서는 기계가 확실한 아군이란데에 이견은 없었지만 쇼가 하는 행동은 다분히 일탈적인 행동이었다. 쇼와 친구들간의 우정이 종종 서로를 속박하거나, 기절시키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형태로 드러나곤 했음을 고려했을때 그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쇼로서는 주의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누구의 협조도 없이 루트의 마지막 흔적이 이 나라 안에서 멎었다는 걸 알아냈을 때 주저없이 짐을 챙겨 나왔다. 애초에 도움이 필요했다면 혼자서 온 나라를 헤메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루트가 중요한 인물인가, 대중없이 떠오르는 잡생각 틈바구니에서 의문을 하나 집었다. 

 

해롤드에게 이야기 했듯 쇼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먹을 때가 되면 먹고 잘 때가 되면 잠을 잤다. 고정적인 일과들이 어그러지면 곧 앞으로의 생도 망가진다는 걸 쇼는 잘 알았다. 루트가 없다고 세상이 뒤집어지거나 살아갈 이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쇼는 여전히 쇼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한두시간 조깅을 한 다음 우유를 사 휑한 아파트로 돌아오는. 냉장고에 무기를 채워 넣고 손질하는 것을 여가로 여기는 사민 쇼였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산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는 이유야 항상 뚜렷하지 않았고 자신을 잃은 채 방황하는 것도 자아가 충실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어쩌면 루트가 그토록 쇼를 살리려 애쓴 건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만약 생존이란 비극을 누군가는 겪어야만 한다면 그건 쇼가 되어야 했을 테니까. 쇼는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쇼는 저 모르게 이루어진 이 작당질을 생각하면 화를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쇼는 절대, 절대로 루트를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짜증나고 귀찮은 점을 하나하나 꼽으며 언젠가 한 대 때려주겠다는 다짐은 차지하고서라도, 쇼의 현실감각을 조율할 수 있는건 오로지 루트뿐이었다. 루트는 진짜 세계와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그러니 쇼는 꼭 알아야 했다. 사실을 알아내 받아들인 다음 고정된 현실을 마저 살아야 했으니까. 

 

시계를 보지 않고 1분을 정확히 세는 건 쇼의 많은 재주 중 하나였다. 60초 수십번을 끝없이 이어붙이는 동안 주차장 위로 쏟아지던 해가 쑥 들어가고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쇼는 앞유리로 떨어지는 눈을 털어내려 이따금 와이퍼 레버를 만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도로변에 붙박여뒀던 시선이 떨어져 나온 건 주차요금 정산지를 붙이러 다가온 직원이 거의 범퍼를 부술 듯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체구가 작은 여자의 험악한 얼굴을 마주한 직원은 조금 주춤하며 피곤한 얼굴로 불쑥 영수증을 내밀었다.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던 쇼의 주머니에서 백 달러짜리 지폐가 나오는 걸 본 그는 숨기지도 않고 툴툴거렸다. 거스름 돈 가져올테니 여기서 기다려요. 쇼는 필요없으니 그만 가보라는 말을 던지고 영수증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신발 밑창에 벌써 질어진 눈이 미끌거렸다.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고 일몰은 코 앞이다. 해롤드가 있는 뉴욕도 어스름히 누런 땅거미가 질 무렵이라는 말이었다. 

 

늘 전화를 받기만 하다보니 먼저 거는게 어색했다. 낡은 전화부스 앞에 서서 괜히 영수증이나 내려다보던 쇼는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기계의 눈을 벗어나기가 이렇게 쉬웠던가? 그레이스와 함께 저녁이라도 하고 있기를 바라며 번호 몇 자리를 꾹꾹 찍어 눌렀다. 거의 곧장 수화기 들리는 소리가 났다. 

 

"별 일 없죠?"

"별 일 없냐구요? 쇼 씨. 대체 어디 계신겁니까?"

"쓸데없는 걸 묻네요. 기계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당신이 나가버린 직후로는 거의 말을 안 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을 걸 때는 번호가 나왔을 때 뿐이에요."

 

2분.

 

"그건 좋은 소식이네요. 내 번호가 아직 안 나왔다니, 적어도 목숨 내놓고 시체나 찾으러 다니는 건 아닌가봐요."

"부디 다시 생각해봐요. 루트가 정말…… 어떻게든 기계가 알아낼 겁니다. 눈에 띌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요?"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살아있다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 같군요."

"냉정하네요, 핀치. 그래도 맞는 말이에요. 그 인간 좀 멍청한 구석이 있으니까. 내가 데시마에 잡혀갔을때도 그랬겠죠?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그땐 좀 섭섭했어요."

"사민."

"루트는 왜 내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있어서? 물론 난 괜찮아요, 핀치. 매일같이 술을 마시거나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도 않고 누구처럼 자살특공같은 것도 않고요."

 

앞으로 25초. 쇼는 입술을 물었다. 해야 할 말을 정하고 전화를 건 것은 아니다. 안부나 묻자고 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확실히 이런건 쇼의 성미에 안 맞았다. 

 

"사실 안 괜찮아요. 난 루트가 묻혀있던 묘지에다 꽃까지 사다 바쳤고 허공에 대고 말 까지 걸었어요. 그게 나로서는 전혀…"

"압니다. 이해해요. 리스나 루트를 잃은 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당신 혼자서는 더 안됩니다. 돌아오세요. 같이 방법을 찾을 수 있을겁니다." 

"글쎄, 루트는 항상 혼자였잖아요. 난 빚 지고 살기 싫거든요."

 

동전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툭 끊겼다. 신호 대기음만 이어지는 수화기를 잠깐 그대로 들고있던 쇼는 천천히 돌아섰다. 

 

쇼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자신이 제일 잘 하는 일을 해야했다. 정보를 모으고 목표물을 선정한 다음 제거하는 일. 정말로 마지막 단계를 실행하게 될지 내심 기대되긴 했지만 그럴 일이 생기는 건 그다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어쨌든 쇼는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또다시 목과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이먹은 루트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 세상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다가와 안기면 마음에 절벽이 패이는 것 같았다. 쇼는 뜨겁게 익어버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계속 닦아냈다. 이것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정신적 상해라고 불러야 하나. 결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딱지가 앉아버리는건가. 

 

팀이 쇼를 영영 잃었음을 고통스럽게 확신해 갈 무렵, 루트는 어디가 망가져버린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차라리 말도 없이 보내야 했으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텐데요. 마지막을 추억할 거리를 쥐고서도 인간은 불행하도록 만들어 진 모양이었다. 쇼는 자기가 가진 기억을 어떻게 써야 할 지 쉬이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남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점 만은 진실로 다행이라는 것 뿐이었다. 

죽음은 상태의 전환일 뿐이야. 루트는 그렇게 말하곤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감정과 표정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쇼도 알았다. 그렇게 하면 웃는 입매 끝에 맺힌 떨림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것 처럼. 그건 거짓말이었다. 빨갛게 깜빡이는 카메라 불빛 밑으로 차를 몰아 쏜살같이 지나가며 쇼는 고개를 수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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