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가메시는 꼼짝없이 운전면허를 따야만 했다.
사해의 성배전쟁이 끝나고 친우와 함께 나란히 육체를 획득한 날로부터 얼마간 각자의 전 마스터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일개 마술사가 공문서를 위조해주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극곰? 그건 하이랜드 와일드파크에도 있어요, 기차로 하루면 갈 수 있는데요.”
그가 자신의 이전 마스터인 산라 망오에게 들이닥쳐서 다짜고짜 엘키두와의 여행에 운전기사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자 산라는 모니터에서 눈도 겨우 떼며 퍽 성가시다는 듯 대꾸했다.
“굳이 북노르웨이까지 가서 실물을 보고 싶다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서 왜 제가 거기까지 함께… 컨퍼런스까지 얼마 안 남아서 바빠요.”
“호오? 잡종이 연구비를 자진 반납하고 싶은가 보구나.”
“으윽…”
영웅으로써 나름대로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길가메시에게는 산라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모양만 봐도 그 조그만 머리통 안의 내용물이 도르륵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금률로 길가메시가 벌어다 주는 연구소 자금줄을 놓치기도 싫지만, 발제문 마감까지 하루를 앞다투는 차에 두 친구의 관광 가이드 역할에다가 제 시간을 할애하는 것 또한 달갑지 않으리라. 과연 뭐라고 말할지 어디 한번 보자는 식으로 길가메시가 문틀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기다리자, 산라의 맞은편에서 조용히 타자를 두드리던 테이트 실버가 거들었다.
“제가 만약 엘키두라면 친구와 오붓하게 둘이서만 여행하고 싶을 거예요.”
“둘이서만, 이라.”
“그렇죠, 두 사람 다 수육한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건 마치, 후훗, 일종의 허니문 느낌으로…”
“감히.”
묘하게 놀리는 듯한 어조에 길가메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 편으로는 그 지점을 가만히 생각하다 마침내 납득한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전선과 이사박스, 서류함과 난방기기가 어수선하게 놓인 연구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와서 산라의 책상에 놓인 차키를 낚아챘다.
“이건 빌려 가겠다, 잡종.”
“돈이 많으면 제발 그걸로 차를 사요!!”
기가 막혀 펄쩍 뛰어오르는 산라의 비명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꾸도 없이 그는 유유히 걸어 나갔다. 다시 의자로 축 가라앉는 그녀의 한탄에는 성배전쟁이 시작된 시점부터 꾸준히 묵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세상에, 마치 제멋대로인 노부부를 보필하고 있는 셈 같아. 심지어 그중에 한 명은 심술궂은 할아버지고.”
“나는 저 두 사람 닮고 싶던데.”
“뭐? 도대체 왜?”
테이트는 타자를 잠시 멈추고 산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솔직하잖아.”
“…”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마는 듯, 산라가 말문이 막혀 하자 테이트는 제자리에 멈췄던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조용한 실내에서는 한참을 그렇게 키보드 소리만 울렸다.
“…테이트.”
“왜?”
“하아…집에 갈 때 태워줘.”
“오늘 집에 갈 수 있으면 말이지? 열심히 하자.”
“젠장.”
-
던커크를 지나 벨기에의 북해 해안으로 접어드는 고속도로, 타이어들이 차게 얼은 아스팔트를 스치는 소리가 잦은 끊김 없이 길어졌다.
A16구간을 지나는 동안 길가메시는 이미 앞쪽으로 추월해서 끼어드는 차량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진이 빠져 있었고, 조수석에서 그걸 내내 듣고 있던 엘키두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력을 연결해서 그 회로를 인식하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비마나에 비하면 이 조그만 빨간색 차체는 조잡하고 성가셨다. 안전벨트라는 것 또한 길가메시의 신경에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선 변경 신호가 뭐 어쨌다고? 감히 잡종들이 짐에게 기색을 드러내는 것을 누가 허락했단 말이냐?”
“하아…”
고문 같은 구간이 끝나고 해안도로에 올라서고 나서 곧 그들은 무슨 음악을 틀 것인가에 관해서도 다퉜다.
서로가 좋아하는 곡을 번갈아 가며 하나씩 선곡하기로 했지만, 길가메시 자신이 선택한 웅장한 바그너 이후로 엘키두가 고른 스래시 메탈이 이어지자 그는 그 소란스럽고 야만적인 소리를 더 참을 수 없다며 불평을 터트렸다. 네놈은 모든 취향이 잡스럽다느니, 그러는 너 또한 왕족이었다고 해서 여생까지 고리타분할 필요는 없다느니 하며 입씨름을 늘어놓다가 결국 아무것도 틀지 않기로 합의하자 둘 사이의 침묵 위로는 해안도로의 바람 소리만이 떠다녔다. 그러다가 겨울바람이 차다며 창문을 닫을 것인가 갑갑하니까 열어놓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짧게 다퉜다.
두 사람이 탄 차가 동쪽 방향으로 한참을 전진하는 동안 나른한 태양은 정오의 자리에서부터 수평선 반대편의 내륙 쪽으로 기울어졌다. 길가메시가 엘키두를 흘긋 곁눈질할 때엔, 그의 초록 머리카락이 반쯤 가린 매끄러운 뺨 위에 졸린 햇살이 내리쬐었다. 엘키두는 차창 건너편에 흘러가는 바다를 바라보듯 조용했다. 아주 옛적 같이 떠났던 모험 길에서 긴 수평선 곁을 지금처럼 지나친 적도 있었고, 수도 없이 기나긴 지평선도 함께 지나쳤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기 이 단촐한 풍경이 마치 과거에서 온 데자뷔처럼, 잊어버리고 있었던 미래처럼 마음속에 손톱자국을 찍는 듯했다.
문득 갈매기 한 마리가 가까이 날아왔고, 그걸 본 엘키두의 연둣빛 속눈썹이 반짝 하고 위아래로 떠졌다. 그리고 자상한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구부러졌다.
길가메시는 며칠 전에 두 사람이 동물원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런던 동물원에는 북극곰은 없었고, 곰 중에서 가장 작은 곰종인 말레이곰 가족이 있었다.
길가메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엘키두 또한 동물원이라는 곳에 한 번 방문하면 그 이후에는 별로 관심 가질 것이 없으리라 생각해 데려갔지만 엘키두는 그 장소를 오래 맴돌았다. 특히 어미 말레이곰이 새끼 곰의 머리를 핥아주는 모습을 숨죽이고 바라보던 낯선 눈길. 영령 소환과 수육이라는 변태를 거치며 새로 태어난 친우에게는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눈동자만 한번 쓱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속속들이 꿰뚫어져 보이던 과거라는 게, 가끔은 실제 시간만큼이나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길가메시는 핸들을 조금 더 강하게 쥐었다.
해안도로가 끝나고 내륙에서 네덜란드까지 고속도로 3개를 거치며 약 2시간, 네덜란드에서 아른헴 방향으로 횡단하며 또 2시간, 독일에 진입해서 뮌스터란트까지 들어가는 데에 또 2시간쯤 사용했더니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졌고, 위도 변화에 의해 기온은 점점 더 으슬으슬해졌으며, 길가메시의 얼굴엔 그 시간만큼의 피로가 찌들어 있었다. 한참 전부터 도로 위의 자동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있었고, 길게 늘어지던 그림자들은 마침내 어둠 아래로 사라졌다. 그는 피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뮌스터 구시가지에 있는 숙소까지 약 20분 거리를 남겨두고 휴게소에서 멈추어 섰다.
멀리 마을의 희미한 불빛을 앞두고 둘은 두껍게 썰린 감자튀김을 한 봉지씩 가져와 테라스에 기댔다. 트럭 운전사들이 고단한 얼굴로 벤치나 차량 안에서 쉬고 있었다.
“짠 맛이네. 너도 먹어봐, 길.”
“맛에 대한 묘사가 그게 다냐?”
길가메시도 바삭하고 포슬포슬한 감자튀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후텁지근한 온기가 입김으로 다시 새어 나왔다.
“따뜻하군.”이라는 말만 남기고, 몇 시간 만에 맛보는 음식을 입에 하나씩 둘씩 계속해서 집어넣는 친우를 보며 엘키두는 “맛에 대한 묘사가 그게 다야?”라고 킥킥거리며 대꾸했다.
차가운 교외는 밤하늘이 짙었다. 넓게 펼쳐진 농경지 너머 울창한 숲이 멀리 덩어리졌고, 간간이 들리는 고속도로 소음 외에는 주위가 한적했다. 엘키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
“왜.”
“마차자리에 대해 기억해?”
길가메시도 엘키두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별들이 밝다 못해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성배전쟁 동안에도 계속 보아왔던 밤하늘이지만, 두 사람은 이제 계약도, 마스터도 없이 자유로웠다. 육체의 죽음이 그들을 좌로 돌려놓기 전까지는 아주 한동안 그러할 것이다.
“어째서 이 내가 그런 기초적인 것도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하지? 바로 저기에 있지 않느냐.”
“그리스 이후로 이제 저건 큰곰자리래. 테이트가 알려줬어.”
“그러냐.”
길가메시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감자튀김을 입안에 하나 더 집어넣었다.
“큰곰이라는 건 칼리스토라는 요정이야. 신들에게 배신당해서 곰으로 변했어.”
“허, 저런. 신이라는 것들이 원래 항상 그따위지.”
“그리고 저 옆의 꼬리 달린 국자가 작은곰자리야. 칼리스토의 아들이래. 꼬리에 북극성을 매달고 있어.”
인간에서 동물로 변신하는 이야기인가. 녀석과 반대 방향이군.
길가메시는 감자튀김을 우물거리다 꿀꺽 삼키고 종이봉지를 손으로 구겼다.
“자식도 엄마 옆에 나란히 붙여준 거로구만.”
“엘키두라는거 말야. 어찌 보면 단일종이었지.”
엘키두가 난간에 턱을 괴고 뜬금없는 말을 읊조리는 바람에 길가메시는 종이봉지를 던지는 손을 미끄러트렸고, 동그랗게 구겨진 봉지는 쓰레기통 테두리에 튕겨져 나왔다. 투덜거리며 걸어가서 그 봉지를 주워올리는 동안 길가메시는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퍼즐들을 맞췄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가는. 대충 알고 있다.
“존재를 다시 얻었더니, 이제 그리운 이가 생기는 거냐?”
자신의 말이 왜 볼멘소리처럼 들리는 것인가에 대한 짜증.
종이봉투가 쓰레기통에 툭 하며 떨어지는 소리는 그 짜증을 닮았다.
그 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 엘키두는 여전히 해사하게 웃는다.
“새하얗고 커다란 곰들이 북극에서 벗어나서 점차 노르웨이 본토로도 내려온다는 거 말야. 꼭 보고 싶어.”
“그래서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잖느냐. 이제 차로 돌아가지.”
더 이상 휴게소 조명 아래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돌아서는 길가메시의 등에 대고, 엘키두는 말했다.
“나는 너도 그리워, 길.”
길가메시는 오늘 하루 종일 함께 차 안에 갇혀 있었던 자신의 친우를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 소환되어서 영혼이 형태를 다시 되찾기 전까지, 무언가를 그리워할 수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기곰과 서로 등을 맞대고 회전하는 엄마곰자리 아래에서 다시 살아난 영웅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별자리의 이름이 바뀔 만큼 아주 긴 시간 아래였다.
그 예전에는 어땠더라? 서로를 그리워했었나? 오히려 기나긴 길 위에서 굳이 마차 안에 가둬놓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곁에 서로가 있는 것이 아주 당연했고 또 그래야만 했던 시간들이었다.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손이 닿는 가까이에 있었다.
길가메시는 이제 자신의 친우에게서, 두 사람에게서 무엇이 변화했는지 마침내 눈치챘다.
그건 그리움의 존재였다. 그 한때는 상상할 수 없었던 서로의 부재가 어느 비 오는 날에 태어났었고, 이제 그 감각은 두 사람의 영원과 함께 불멸할 것이다.
“나와 함께 그리워해줄래?”
“네가 말하지 않아도 영겁을 그래 왔다.”
엘키두가 그의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바위가 녹은 듯한 불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빛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굳지 못한 뜨거움처럼, 고통스러운 소용돌이를 남겼다.
“미안해, 나에게는 이런 그리움을 가지고서 살아있는 것이 처음이야, 길.”
연둣빛 친구는 다가가서 그 불길을 감싸듯이 꼭 끌어안아주었다. 마치 자기 자신의 안쪽에 마저 남은 공허를 열기로 채우듯이.
“태어나서 처음이야. 보고 싶어. 사랑하는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