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 육도에서 동쪽으로

Nar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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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육도에서 동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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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스무 살 우치하 사라다는 우즈마키 나루토의 시신을 데리고 50여 년 전으로 향했다. 고의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50이란 숫자만은 말이다.어찌 되었는지, 갑작스레 몸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또 불타 버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도 –나름대로- 그가 뜻한 바는 없었다.⋯누가 믿겠냐마는.
Note
반야 般若 - 대승 불교에서,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 온갖 분별과 망상에서 벗어나 존재의 참모습을 앎으로써 성불에 이르게 되는 마음의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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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바라보되

끝을 알면, 오히려 모두 내려놓게 된다. 지금 그들 사이 분위기는 참으로 오랜만에 조용하고 편안했다.

“다들 정말 파란만장했구나.”

딸은 담담하게 대답을 흘렸다. 몇 시간을 걸쳐 닌자 세계의 한 역사에 대한 증언을 직접 들은 것치고는 예사로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구태여 실망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건 부모가 어쩌다 자식에게 푸념하듯 늘어놓는 그런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전수에 가까웠다.

“예전에 이미 들은 것도 몇 있긴 하지만⋯, 환생이라니. 그건 또 몰랐네.”
“더 일찍 다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안 그래도 돼. 설마하니 누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기대나 했겠어? 굳이 기대가 아니더라도⋯.”

딸이 실소를 터뜨렸다.

“있잖아, 나는,”

목판 위로 장기알을 옮기는 소리가 맑으매 꾸밈없이 고아했다. 고해하듯 털어놓는 딸의 앞에 앉아, 아버지는 부러 수를 두길 미뤘다.

“옛날에는, 여기를 위해 내 모든 걸 다 바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어.”
“닌자로서 말이냐.”

우치하 사스케가 물었다.

우치하 사라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호카게가 되고 싶었으니까.”

갓 약관을 맞은 청년의 머리가 더욱 떨구어졌다.

“여기에 뭐 별달리 이상한 마음이 생겼다거나 하진 않았어. 그냥 지금은 그럴 수 없게 됐을 뿐이지. 낯설었어. 잘못도 기꺼이 덮고 가리고, 공으로 꾸며줄 수 있어야 하니까. 내가 저지른 일들도⋯.”

곧 다시 침묵이 깔렸다. 사라다는 고개를 올려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창 혈기로 끓어 넘쳐야 할 검은 눈은 고요했다. 그 속에 나이든 아버지의 모습이 담겼다.

“아빠는 날 탓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머리로는 이제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난 아빠 딸이기도 하고, 다들 말마따나 ‘이성적’으로 옳은 선택을 했겠지. 하지만, 정말 그 정도면 다 되는 거야?”

답을 구하기보다는 그저 넘기지 못한 감정을 쏟아내는 날 선 말이었다. 천하의 사스케도 가슴 속이 조금씩 욱신거렸다.

그러나 사스케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는 덤덤히 입을 떼었다.

“그날, 난 당장에라도 내 온몸과 이 눈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었고, 일에 일조했다면 그게 누구고 무엇이든 모조리 잡아 대가를 치르게 하려 했다. 그 피를 온 땅에 흩뿌려 본보기를 보이고 싶었다. 어떤 자들은⋯, 그 생각대로 되었다.”

이미 충분하리만큼 오래됐고 가장 깊은 상처였다. 어찌할 줄을 몰라, 묻어두고 꾸역꾸역 삼키는 수밖에 없던 그런 상처였다.

“하지만 아예 무엇도 하지 못했다면, 그 손으로 직접 이곳을 파괴하는 광경을 보고 말았을 거다. 견디기 어려웠겠지. 길은 두 개였다. 죽어서 떠남을 애통해하는 것과 살아서 그 실망과 원망을 듣는 것.”
“생각하기에는 두 번째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지 ‘않은’ 자를 향한 원한이 얼마나 큰지는⋯. 평생을 뒤로하고 원수가 되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사스케는 딸을 똑바로 보았다.

“오히려 부끄러운 점은, 어린 네게 그 모든 것을 떠맡기고 말았다는 점이지. 후회한다면 다만 그것만이⋯, 내겐 그러하구나.”

사스케의 말이 끝나도, 사라다는 아무 움직임 없이 무표정한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곧 한 마디를 툭 내보냈다.

“⋯답답하네.”

그간, 사라다는 누구보다 분노했을 아버지가 자신을 책하지 않은- 용서한 이유를 안다면 답을 얻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사라다가 깨달은 사실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우치하 사스케가, 그리고 다른 어떤 이가 그를 용서했다 한들, 그건 망자의 뜻이 아니다. 본질은, 망자의 마음은, 답은 누구에게서도 구할 수 없다.

‘결국은 끝까지 다 예상이야. 그 사람이 이랬을 거다, 또 저랬을 거다. 사실 당연하지. 상처는 같이 받았겠지만, 어떻게 해도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는진 누구도 몰라.’
‘산 사람한테 용서받고, 그 까닭은 또 뭔가 고민해 봤자, 제일 중요한 건⋯. 그 긴 시간을, 전부 그리 보낸 게 이걸 알려고였나?’

사라다의 머릿속이 싸움터마냥 날카롭고 시끄러웠다. 내내 무심하듯 굳어만 있던 눈가가 끝내 뜨거워졌다.

조금만 더 일렀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잡을 수 없는 걸 갈구하려 그 하루하루를 허망하게 흘려보내진 않았을 텐데. 풀어낼 수 없는 것을 뒤로하고 속죄와 보존에 온 마음을 쏟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전부 소용없는 일이었다.

“미안해, 아빠. 그런데,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아.”

사라다는 허탈한 티를 그대로 내었다. 사스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드러난 한쪽 눈에 답지 않게 슬픔이 가득해 보였다.

사라다는 그런 아버지를 마주하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앞쪽 벽에 한 물건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음, 시간이?”

사라다가 부러 목소리를 가볍게 하여 말했다. 사스케는 따라서 뒤돌아보았다. 천장에 가깝게 걸린 벽시계가 ‘늦다’에 가까운 시간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사스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딸을 보았다. 사라다가 먼저 장기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가서 엄마 보고 올 거지? 다녀와. 난 미리 가 있을게.”

사스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손을 움직여 딸을 거들었다.

마지막 장기알이 사스케의 손에서 함으로 돌아갔다. 즉시 사라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허리춤에 걸린 것은 서로 부딪치면서 잘그락대는 소리를 냈다. 크고 무거운 쿠나이 두 개를 여러 번 꼰 단단한 줄로 이어, 만력쇄처럼 휘두를 수 있게 한 그만의 무기였다.

눈을 돌리니, 사스케는 이미 외출 준비를 거의 마친 뒤였다. 사라다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천천히 와도 돼. 재촉할 필요 없어.”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또 한 번 멈춰서 덧붙였다.

“정말이야.”

사라다가 돌아섰다. 사스케는 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곧 움직였다. 얇은 겉옷이 잠시 때를 미루고 의자 위에 걸쳐졌다.

사스케는 한 곳으로 가 멈춰섰다. 형형색색 액자들 속에 가족의 옛날이 남아 있었다. 그의 시선을 붙든 사진 속에선 한 여자가 여전히 밝게 웃었다.

부녀는 그의 이름을 사쿠라라 기억했다. 사스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름에 잠겼다.

사라다는 여전히 아버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 모습은 부러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그는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현관에서 맞는 신발을 신고, 문을 열어 어두운 밤 속으로 나아갔다.

지하에 깊게 뿌리내린 신목들이 사방에서 달빛을 받아 흉물스레 드러났다. 사라다는 이제 익숙해진 광경을 신경 쓰지도 않고 스쳐 지나갔다. 허리에 찬 무기가 작게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사라다에게도 들렀다 갈 곳은 있었다. 솔직히 그다지 좋은 기억이 깃든 장소는 아니었으나, 사라다는 어쩐지 그곳에 계속 끌리는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그 일대는 무덤을 대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애증을 품은 옛 친구들의, 마지막 모습을 추억할 유일한 장소여서일지도 몰랐다.

사라다는 조금씩 그곳에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예상치 못하게 더 앞선 방문객이 있음을 알게 됐다. 순간 경계심이 목 뒤를 서늘하게 했다.

그러나 사이의 거리가 더욱 좁혀지면서, 그 느낌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라다는 친숙한 이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방금과는 다른 경계를 띄웠다.

왜냐하면, 그였기 때문이다. 둥근 끝 선으로 짧게 다듬은 머리칼, 아버지를 닮아 훤칠한 키, 확연한 그만의 차크라.

방문객은 ‘휴우가’ 히마와리였다. 당시 열다섯도 되지 않은 나이, 사라다가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 버리고 만 바로 그 히마와리였다.

사라다가 다가가는 것을 눈치채자, 역시나 히마와리는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사라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땅에 앉은 그의 앞에 멈춰 서서 인사했다.

“안녕, 히마와리.”
“사라다. 밤중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네.”
“어쩌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너는?”
“꿈을 꿨거든.”
“꿈?”
“망할 것들, 거기서도 좋은 모습은 참 징하게 안 보여 줘.”

사라다는 입을 다물었다. 히마와리가 이렇게 말할 사람들이란 이 세상에 단 둘뿐이었다. 여기 이곳에서, 하루 차이를 두고 같은 방식으로 죽은 두 사람. 그가 사랑하고 미워한 두 벗. 우즈마키 보루토와 우즈마키 카와키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반란 행위자이며 또한 대 테러범이었다. 그 모든 일을 거의 단신으로 저지를 만큼 강력한 닌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상부에서 둘의 시신을 수습한 후 그 처리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물론 소문은 사방에서 나돌았다. 누군가는 별일 없이 태워 숲과 강 어딘가에 뿌렸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뼛가루를 사람들이 밟고 지나도록 길바닥 한가운데 묻어 버렸다고도 했다. 종국에는 사실 그들이 죽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마을 이익을 위해 계속 사용되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그 둘의 누이동생인 히마와리조차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단 것이다. 아버지를 비명에 잃고 나서도 웃음은 사라지지 않던 히마와리이건만, 이 뒤로는 상당히 달라지고 말았다.

“미안해, 히마와리. 난⋯, 어떻게 해도 너한테 할 말이 없어.”

사라다가 말했다. 히마와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질린다는 태도였다.

“아직도 그 얘기야? 이러다 또 싸우겠네.”
“난 나뭇잎 닌자야. 그 둘에게는 친구였고. 나는⋯,”
“그만, 그만, 그러니까 그 얘기를 하지 말라는⋯! 말라는 거잖아. 응?”

히마와리는 분에 차 소리를 지르려다 간신히 참아냈다. 치켜든 눈썹 아래 연보랏빛 눈에서 성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라다는 말없이 그 한 쌍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내 몸을 돌려 히마와리와 마주하지 않도록 옆으로 옮기어 섰다.

히마와리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언니는 나뭇잎 닌자고, 말마따나 7대 호카게의 사람이었지. 그 둘한테는 친구였고. 우리 아버지를 지키거나, 어떤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었을 거야. 아버지 일 뒤로 카와키가 엇나가고, 마을에, 세상까지 이 지경이 되고, 영문은 모르지만 보루토랑 카와키는 결국 여기로 돌아와서 죽어버렸어.”
“다 사실이고, 일어난 일이야. 그런 걸 계속해서 되짚어 봐야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히마와리가 말했다.
“내겐 의무가 있었어. 난 그걸 배신했고. 그 뒤로 나쁜 일이 이어졌으니, 분명히 내 실책이기도 하겠지.”
“이래서 지긋지긋하단 거야. 그 일엔 전부 외계인들이 있었잖아. 아버지도 고전했다던 상대를⋯. 그리고 친구면 무조건 서로 다 알 수 있어? 그건 환상이잖아.”

히마와리는 한 번 숨을 들이쉬고 계속 말했다.

“언니 의지가 개입한 게 없어. 대체 어디서 그런 감정이 나오는 건데? 자책한단 생각으로 자꾸 날 쫓아다니면서 사과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계속 미워하기만 바라고. 이게 날 생각하는 일이야?”

사라다가 말이 없자, 히마와리도 잠시 쉬며 마른 목을 달랬다. 한숨을 내뱉고 히마와리가 다시 말했다.

“이제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무슨 짓을 해도 아빠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난 열한 살이었어. 다른 의미로 형제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열두 살이었고. 같은 의미로 알았을 때는 열네 살이었지. 지금 난 열일곱 살이야.”
“그 시간 동안 내 삶에 있었던 건, 그냥 날 계속 그때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게다가 그게 정말 최선인 줄로만 알고. 언니, 우치하 사라다 말이야. 아직도 눈치챌 수 없어?”

사라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올려 멍하니 어두운 허공에 눈을 두었다. 굳게 닫힌 입이 다시 열렸을 때, 그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난 분명 이기적이었고, 아무것도 몰랐단 말도 맞아. 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대하기보단 ‘취급’을 했어.”

그리고 한숨 뒤에, 몇 문장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 히마와리. 만약 너도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내가 왜 이러는지 충분히 이해할 거야. 그 전에 날 죽이려 들겠지.”
“내가 또 뭘 모른단 말이야?”
“있어. 다들 숨기라 말했고, 그래서 숨겼어. 하지만 너한테만은 진심으로 끝까지 숨기고 싶었어. 그런데 어차피 끝이 가깝다면, 이 정도는 털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비겁한 것도 맞겠어.”
“끝이라니, 무슨 소리야?”

히마와리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에 널린 신목들을 가리켜 보였다.

“물론 지금 이렇긴 하지만, 그래도 끝이라고까지 말하려면-”
“난 지금 시간을 되돌리러 가.”
“뭐?”

히마와리가 결국 소리쳐 물었다. 사라다는 무감각하게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술법을 발견했어. 그 술법을 쓰면, 목표 지점 후부터 현재까지는 전부 소멸해서 없던 일이 돼. 대신 사용 대상의 머릿속에만 기억으로 남지. 내가 옛날로 가서,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미래를 만들어볼 거야.”
“사라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 나무들을 봐. 느리지만 결국 모두 피를 빨리듯이 말라서 죽게 될 거야. 우리 기술로는 오오츠츠키처럼 행성계나 은하를 가로질러서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천천히 죽어가는 것뿐이란 소리야.”

일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게 되는 거야.

머릿속에 새겨진 한 마디가 맴돌았다. 사라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비틀어 버리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어. 나는 오오츠츠키에 관한 지식도 더 가지고 있으니, 그 시간에서 도움이 될 거야.”
“그 술법은 괜찮긴 해? 일이 잘못돼서 너무 멀리 가 버리면? 살거나 태어나야 할 사람이 죽고 없을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사라다는 작게 움찔하더니 기어가듯 대답했다.

“⋯동반자가 있어. 괜찮을 거야.”
“그건 또 누군데?”

사라다는 대답하지 못했다. 바싹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히마와리는 눈을 굴리며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그가 다시 말했을 때, 그 속에는 어이없는 기분을 감추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이 봐. 그 내가 모른다는 부분은 진짜로 말해 줄 생각이 있기나 해?”
“나는⋯! 난 숨기고 싶지 않아, 히마와리. 그냥 두려울 뿐이야. 전부 다⋯.”
“그러니까, 대체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데?!”

울분에 찬 소리가 한밤중 무겁게 깔린 공기를 파고들었다. 짧은 메아리가 멀어지고 격정 속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히마와리는 마치 지긋지긋한 싸움을 치르듯 씨근댔다.

“대체 뭘 숨기고 있어?”

마음속에 족히 깔려 죽을만한 추가 매달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사라다는 붙은 입술을 위아래로 떼어 내었다. 장갑을 낀 손이 서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날은-”

사방이 여러 번 무겁게 울리다 잦아들었다.

과연 백안 공주의 딸다웠다. 사라다는 혈이 제대로 틀어막힌 왼쪽 어깨를 감싸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히마와리는 여전히 백안을 연 채 살기를 잔뜩 내뿜으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라다가 사용하는 줄은 묶이면 움직일수록 살을 파고들어 고통스럽게 할 뿐인데도, 히마와리는 아픔 따위 느끼지도 않는 듯 계속 으르렁거렸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아무 말도 안 할게. 미안해.”

사라다는 틈을 주지 않고 곧장 히마와리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반항이 무색하게 히마와리는 바로 기절했다.

사라다는 멀쩡한 오른팔만을 써 가며 힘겹게 포박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숙련된 닌자여도 잔뜩 지치고 긴장한 한 손은 자꾸만 헛돌았다. 그때 옆에서 불쑥 다른 손들이 튀어나왔다.

사라다는 깜짝 놀라 고개를 올렸다. 그 주인들을 알아보고 자못 놀라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파고들었다.

“살벌하네.”
“6대 님.”
“그래. 텐조, 넌 거기 말고 저 아래쪽부터 봐라.”
“어디서부터 보셨어요?”
“그런 거 없다. 좀 격한 차크라 형세가 느껴지길래 와 봤더니, 마침 딱 이러고 있던걸. 이유는 묻지 않으마. 너희 둘 사이라지만 이 정도면 안 봐도 뻔한 일이지.”
“죄송합니다.”
“사과는 해야 할 사람에게 아껴두는 게 낫지 않겠냐.”
“⋯네.”

어찌 그리도 다 알고 있는지. 사라다는 6대 호카게를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움직임이 모이자 일은 금방 수월해졌다. 마침내 히마와리는 핏빛 줄에서 풀려났다. 길게 줄 자국이 남은 곳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사라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카카시가 텐조에게 말했다.

“일단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너도 시간 안에 거기로 와라.”
“예.”

텐조가 여전히 의식 없는 히마와리를 안아 들고 빠르게 사라졌다. 사라다는 바로 무기를 주워들어 둘둘 말았다. 티는 안 나도 검은 장갑에 계속 피가 묻어났다. 카카시가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일도 이제 없게 되겠군.”
“사과할 기회를 놓치는 거죠. 저 애가 말했어요.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분명 그렇겠죠.”
“뭐, 또 그렇게도 되겠구나.”

사라다는 조심히 무기를 허리춤으로 되돌렸다.

“7대 님은⋯,”
“다들 조용히 관을 옮기는 중이다.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했겠군.”
“저희는 끝까지 그분께 잔인하네요.”
“잔인하지. 잔인하고 무례하고⋯.”
“용서가 아니라 책망해 달라고 빌어야 할까요.”
“글쎄다. 워낙에 무른 녀석이니⋯, 그런데 말이다, 그것들은 정말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 뭘⋯,”
“히마와리가 한 말들. 오래전 미완성으로 봉인됐으니 불완전한 술법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은 함부로 ‘목표’를 세우긴 어려운 부분이지. 틀린 것은 하나도 없어. 어떻게 할 셈이냐?”
“보신 적이 없다면서,”
“그래도 들은 건 있으니까.”
“⋯그러신가요.”

사라다는 굳은 얼굴로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신목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게 자란 것이 가지를 뻗어 환한 보름달마저 에워싸고 있었다.

사라다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잘해 보겠다며 한 것들이 오히려 부정적이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죽지만 어떤 사람은 살 테고, 어떤 이는 비참하게 되지만 어떤 이는 비상할 것이다. 지금 이 일을 알든 알지 않든, 누군가는 그를 사랑하고 누군가는 그를 증오할 것이다.

또한, 이 일은 보다 나은 지금을 담보한다고는 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계속 살아가 보려고 했던 의지를 강제로 묵살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전 어찌해야 할까요.’

사라다는 시선을 조금 내려 굵게 자란 신목들의 줄기를 보았다. 삶이자 동시에 죽음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들은 본능적으로 혐오감과 동시에 압도감을 주었다.

사라다는 자연스레 흘러나오듯 말했다.

“제가, 전부 다 짊어지고 가야죠.”

그날, 깊은 밤 중에 어느 곳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으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시간과 역사가 마침표 없는 끝을 맺었다. 끝나지 않았으나,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대가 그렇게 스러졌다.

그리고 여기, 사방이 고요했다. 불이 나무를 씹는 소리가 눈치도 없이 타닥타닥, 끊임없지만 대답이 들려올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삼키고 흔적만 남은 불씨가 가증스레 어여쁜 모습으로 주변을 밝혔다.

까맣게 타 버린 기둥 아래에는 사람이 있었다. 불에 타 녹아내린 남자였다.

그 품에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꼭 안긴 것은 작은 아이였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열 살이 되지 않을 어린아이. 검은 머리에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디서나 쉽게 뒤섞일, 하지만 남자에게는 유일할 그런 아이였다.

너는 살 거다.

남자를 일깨우는 것은 목소리였다. 언제나 그의 옆에 있었던, 세상의 모든 감정을 다 동원해도 설명하지 못할 영원한 이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손을 움직여 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 순간 남자는 눈앞이 다시금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살 거야.

이제부터는 그의 모든 것이 될 터였다. 비통, 울분, 친애⋯, 그를 고통 속에 뜨겁게 끓어올라 살게 했고 앞으로 살아가게 할 그의 모든 것이 될 터였다.

남자의 머릿속에는 겪지 못한 기억이 있었다. 그가 암막 속에 있던 세월 동안 벌어진 세상일들은 너무나 크고 어지러워서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살아야 해.

남자는 한때 슬퍼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기뻐했다. 연기가 스민 목과 몸 안, 목탄과 기름 뭉치같이 된 몸 바깥, 그 위를 짓누르는 숯덩어리에도 기뻐했다.

나는 살아 있어.

남자는 아이를 더욱 감싸 안았다. 불씨가 근처에서 기웃대다가 남자의 몸에 막혀 사그라들었다.

바람에 재가 섞이기 시작했다.

옛 소용돌이 마을 터에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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