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Destiny (Video Games)
F/F
G
웅덩이
Note
-오리지널 고스트와 수호자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 길레스와 사슴의 일화 : https://en.wikipedia.org/wiki/Saint_Giles-해당 글은 <최후의 형체> 확장팩이 나오기 이전에 작성되었습니다. 당시 시즌 스토리에서 화합과 평화를 그리려 하면서도 정작 그 모든 것들이 적절한 실체도 없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게임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창 불만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예 데스티니 게임 자체를 플레이하지 않게 된 지금의 시점에서는 그마저도 희미한 퇴적물처럼 느껴지네요.

 주변은 더없이 적막했다. 침묵은 일종의 위장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몰락자의 산발적인 출현을 경계했다. 한참을 시달린 차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숨을 죽인 것 이상으로 숲은 적막했다. 숲 한가운데에 둥근 연못이 있었다. 흔들림 없는 수면은 매끄러운 금속 같았다. 곧 수호자가 될 시체는 물가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중립적이고 온건한 표현이었다. 머리가 수면 아래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다. 질긴 풀줄기 사이로는 옷가지가 헤져 엉켰다. 그가 시체를 되살렸을 때, 혈색이 막 돌기 시작한 팔뚝은 부들부들 떨렸다. 물속에 박혀 있던 머리에서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구토하듯 기침하던 제 수호자에게 길레스라는 이름을 줬다. 

 이름의 기원은 한 성인이다. 성 길레스는 남자였다. 훗날 이 사실을 고백하며, 그러니 여성형으로 이름을 고쳐 길레트라고 불러줄까 제안했다. 그러나 길레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래서 마음에 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호자는 이름의 유래를 반문했다. 그렇게 성인의 일화를 듣고서는, 저를 사슴으로 불렀다. 사슴이 된 그는 이 사실을 퍽 뿌듯해했다. 상호 연결의 징표인 붉은 색 의체를 고집스럽게 쓰고 다녔다. 

 탑에는 처음 들어온 수호자를 위한 프로토콜이 있었다. 각 선봉대장을 만나 안면을 익히고, 이곳이 무얼 위해 직조되었는지 새 수호자로 하여금 확인케 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사슴과 같은 그룹에 속해 있던 어떤 고스트들은 이를 두고서 세례로, 혹은 결혼식 따위로 불렀다. 파트너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이유에서였다. 확실히 구시대의 드라마를 탐닉하는 구석이 없잖았다. 이제 사슴이 그 그룹에 속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 냉담한 듯 여기면서도, 그는 제 수호자가 무엇에 어떻게 반응할지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시련의 장에서 돌아온 길레스는 개머리판에 얻어맞은 팔을 한창 문질렀다. 고스트에게서 회복을 받아 얼룩조차 남지 않았는데도. 당연히 성적은 형편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그 자체로 관념적 인간성을 구현할 수 없듯이. 이는 시간을 들여 계발해야만 하는 소양이었다. 길레스는 총의 반동을 제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지형지물을 활용해 몸을 은폐할 줄도 몰랐다. 고스트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분명 부끄러워 했다. 제 눈을 틀어 막으면 남들이 저를 보는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사슴은 그 모든 감정을 함께 느꼈다. 그는 이를 제 수호자가 겪는 성장통으로 여기면서도 시련의 장에 영원히 발 딛지 않을 줄 알았다. 때때로 길레스는 샤크스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선봉대가 공식적으로 수행하는 작전으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 떨어졌다. 길레스는 두 번째로 길을 걷는 일을 맡았다. 다른 수호자가 한 번 길을 뚫거든 잔류하는 것들을 처리했다. 주로 자원과 적이었다. 엘라스토머 장갑을 끼고 EDZ의 다 무너진 방죽에서 황혼빛 조각을 수집하거나. 네소스의 엑소더스 블랙 근처에서 우두머리와 목적을 잃고 부유하는 몰락자를 정리했다. 

 사슴의 수호자는 타이탄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던 보편적인 타이탄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다면 헌터인가? 길레스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듯했으나, 헌터라고 하기에는 자기만의 황무지와 머나먼 지평선을 꿈꾸지 않았다. 한정된 사람들과의 교류를 즐겼으나, 무언가를 객관적인 언어로 서술하고 전달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아마 길레스가 워록들의 토론 자리에 낄 일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그렇게 자기 자리를 찾았다면 더 '나은' 수호자가 되었을까? 그들 모두는 답변할 수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맥없는 대답이 돌아올 때마다 사슴은 제 수호자가 조금만 더 수호자답길 바랐다. 분명 수호자이기에 행동과 미래를 개척할 권리, 의무, 능력이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수호자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는 문득 길레스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시체. 사실 길레스는 물속에서 호흡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물 밖으로 건져 와서 말려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때면 사슴은 수호자의 툭 불거진 눈을 힐금거렸다. 정신의 일부를 망각과 소멸의 저편 어디에 묻어놓고 왔을까. 어쩌면 그가 처음 부활했던 게  근본적인 실수가 되어버렸을지도 몰랐다. 호흡기로 잘못 들어간 물이 지금도 뇌 속에서 찰랑거리며. 

너무 많은 것들이 휘몰아쳤다. 이전의 것들도 아직 채 정의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것들이 닥쳤다. 허공 위에 다 무너진 벽돌을 쌓고. 또 쌓아가고. 어느 순간 한 번에 무너진다면 폐허가 될 정도로. 헌터 선봉대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자아낸 앙금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는데, 악몽들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모두가 폭력의 책임을 침묵 속에 묻은 채로 화합을 맹세했다. 혹은 그 고뇌마저 찬란하게 수용해냈다. 흑요석 가속기를 가슴에 품은 에이다는 엘릭스니를 포용한 탑을 위해 직물을 짰다. 흰 피륙은 이상적인 미학을 구현했고, 시장 상인들은 그에 높은 가치를 매겼다. 너무나 매끄러워서 균열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말해, 그들이 바로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균열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사슴은 길레스가 가장 위에 있거나 가장 아래에 있기를 바랐다. 가장 꼭대기에 있다면 아래가 무너지는 동안 생존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가장 아래에 있다면 형체조차 남지 않은 채 소멸할 수 있을 것이므로. 언젠가 그들은 한 워록의 손바닥이 피워 올린 자그마한 공허 덩어리가 파괴한 콘크리트 벽을 수복한 적 있었다. 길레스가 배선 몇 개를 연결하는 동안 사슴은 건물이 파괴되는 순간을 역순으로 구성했다. 그토록 작은 관념이 콘크리트 안의 철근을 벗겨낸 것이다. 사슴의 수호자는 이도 저도 아닌 자리에 있었다. 

 어느덧 탑에는 엘릭스니가 들어왔다. 몰락자라는 표현은 지양되었다. 완전히 폐기된 용어는 아니었다. 선봉대는 여전히 인류의 적으로 구는 바깥의 엘릭스니를 몰락자라고 일컬었으므로. 사람의 성대에는 몰락자와 엘릭스니의 구분에 있어서 기준이 존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레스는 네소스에서의 일을 받지 않았다. 특히 몰락자들이 모인 근처로는. 언젠가 사슴의 수호자는 왜 거미와 미스락스가 무리 없이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어느 순간 그는 네소스에 잔류하는 몰락자들의 쉿쉿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반복되는 소리 사이에서의 미세한 차이. 한 묶음의 소리 덩어리에서 변별 자질을 구분하는, 바로 그 자의성이 형성하는 의미.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히 번역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적어도 그것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어떠한 구조적 범주인 줄은 알았다. 그러니 그들은 화합하는 동시에 불화할 것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간이 개입한 탓일까. 그는 무얼 하다 웅덩이 곁에 고꾸라졌을까. 사슴은 길레스에게 이전 생의 기억을 물어보지 않았다. 헌신, 희생, 죽음. 사소한 불만이 있다면 이 세 개의 개념이 먼 옛날에 있었다는 혁명의 구호처럼 되뇌어진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대변자의 죽음이었다. 그 이후로 미덕은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그러나 사슴은 제 수호자를 설명할 수 없어지며 보다 근본적이라고 여겨지는 이 구호를 인용하며 회귀해야 했다. 그가 탑에 홀로 있던 시간은 수호자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더 길었다. 고스트들 사이에서 떠도는 음울한 소문을 잘 알았다. 서로 불화하는 고스트와 수호자의 이야기. 고스트가 지켜 보는 가운데 날카로운 시공 파편을 넓적다리에 찔러 넣었다는 어느 헌터.  

 이 아름다운 공동체에 들어섰다는 사실. 문턱을 넘었다는 자격증. 까마귀를 받아들인 게 바로 그 대책없는 자격을 더욱 대책없게 만들었는지. 범주는 공고화되고 왜 우리 각자는 균열 어린 개인사를 탐색하지 못하는지. 모두 개인사의 심연 아래로 묻어두어야 하는지. 혹은 그곳으로 잠수할 수 없는지. 사슴은 실없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 순간에도 폐허는 퇴적되고 있었다. 유로파의 한설이 그렇듯이. 아나스타샤 브레이가 고집스럽게 성을 달고 다닌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브레이라는 성이 그가 잠시나마 은둔할 수 있는 하나의 아성이 되어줬다는 사실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비록 유로파 탐사가 시작되며 그 불행한 가족사가 온 수호자에게 까발려졌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슴이 솔직하게 제 불안을 고백했다. 

 사슴은 웅덩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수호자를 찾아낸 이후로 한 번도 발걸음 해 본 적 없는 그곳으로. 매끄러운 수면이 붉은 의체를 거울처럼 반사했다. 그는 저 아래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